들뢰즈의 언어로 말하기
조증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붕괴라기보다는 하나의 잠재성의 분출이며, 욕망의 급진적인 흐름이자 통제 불가능한 생성의 진동이다. 전통적인 정신의학은 조증을 병리적 상태로 분류한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적 사유를 빌려오면, 조증은 오히려 자본주의 기계가 억압하고 코딩해온 욕망의 탈코드화 현상으로 읽힌다. 그것은 구조와 규범에 틈을 내고, 기존의 인식 체계를 무너뜨리는 탈주선(line of flight)의 한 형식이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생산의 힘이다. 조증은 이 욕망이 기성의 질서—특히 자본주의적 통제 메커니즘—를 넘어서 탈주할 때 발생하는 과잉 상태다. 조증은 기존의 언어, 상징, 시간감각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연결하려는 급진적인 접속의 열망을 드러낸다. 이때 주체는 더 이상 고정된 자아가 아니다. 그는 리좀처럼 얽히고 확장되는 비선형적 존재가 된다. 그의 말은 방향을 잃은 문장이고, 그의 행위는 체계가 포착하지 못하는 리듬이다.
자본주의는 질서를 요구한다. 자본은 인간을 자아라는 중심으로 고정시키고, 생산성과 성과라는 코드로 욕망을 재배열한다. 그러나 조증은 이 자본의 명령을 거부한다. 조증적 에너지는 통제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비생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기존 구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배치를 창출할 힘이 잠재한다. 조증은 이 체계에서 일종의 과잉, 과도한 회로, 욕망기계의 폭주로 출현한다. 그것은 병이 아니라, 정상성의 허구를 드러내는 증상이자, 구조를 전복하려는 무의식적 실천이다.
들뢰즈적 관점에서 볼 때, 조증은 생성의 정치다. 그것은 상징질서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상징 이전의 상태에서 새로운 질서를 발명하려는 시도다. 조증 상태의 주체는 비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합리성의 바깥에서 사고하는 존재다. 그는 이성의 프레임을 벗어나, 미쳐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을 본다. 욕망의 리듬은 그에게 기존의 구분—정상과 비정상, 현실과 환상—을 무력화시키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감각과 현실을 구성할 기회를 제공한다.
데리다는 "맑스의 유령들"에서, 맑스주의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환상이며, 억압된 과거의 유령은 끊임없이 현재에 귀환한다고 말한다. 조증은 바로 이러한 유령적 귀환의 한 방식이다. 억눌린 욕망, 제거된 혁명의 감각, 탈정치화된 분노는 조증의 형식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개인의 심리 안에 갇힌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 억압의 반사로 읽어야 한다. 즉 조증은 병이라기보다, 지연된 혁명의 또 다른 형태일 수 있다.
지젝은 욕망이 상징계 안에서 조직되는 방식을 보여주며, 주체의 불안정성과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연관 짓는다. 조증은 상징질서의 파열지점에서 발생하는 증상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무한한 의미, 무한한 에너지,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그 안에는 상징질서 붕괴의 공포와 환각이 동시에 존재한다. 조증은 자본주의 주체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과잉을 마주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과잉은 바로, 변화의 문턱이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전통 사회는 이와 유사한 상태를 단순한 병으로 보지 않았다. 샤먼, 예언자, 광인은 사회의 리미널한 존재로 기능했다. 조증적 에너지는 공동체의 전복과 재구성, 통과의례적 구조 안에서 사회 전체를 갱신하는 역할을 했다. 현대사회는 이들을 병리화하고 격리하지만, 그 에너지는 여전히 사회 구조의 모순을 비추는 거울로 작용한다.
조증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그 비합리는 기존의 이성이 담아낼 수 없는 잠재성과 가능성의 언어다. 조증은 탈영토화된 혁명적 감각의 단편이며, 자본주의의 폐허 속에서 여전히 타자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생성의 몸짓이다. 그것은 자본의 질서에서 이탈한 잉여이며, 그 잉여는 언제나 새로운 리얼리티를 향해 도약하려 한다. 그것은 병이 아니라 예감이다. 조증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세계의 예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