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중간즘] 취미가 아닌 힐링
- <오타쿠학 인문>, 중에서 오타 킹 Toshio Okada
(*영화 유튜버 백수골방님의 영상에서 본 내용)
신입 사원 시절 고객사 담당자의 프로필 화면을 보는데 본인 소개 첫 문장을 건덕후 (건담 오타쿠)로 표현한 것을 보고 마음에 적지 않은 신선함이 있었다. 본인이 어떠한 학교를 졸업했고, 유관된 전공을 가지고 있다던지 경험에 대해서 소개하는 게 일반적인데 취미 생활 그것도 약간 오타쿠 기질의 표현을 해 놓은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담당자가 그 회사에서 워낙 일을 잘하는 과장급 에이스였는데, 일을 잘하니까 회사에서도 그렇게 자신을 일보다는 취미로 노출해도 되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경험이었다. 또한, 일터라는 곳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이렇게 표현한 그가 멋져 보였다. 내가 알기엔 그 고객사 조직 문화가 계층적이어서 그러한 표현을 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 더욱 그렇게 생각한 기억이 있다.
신기한 것은 나에게 이 경험은 이후 상당한 파장을 가져온 것이다. 어릴 적에 프라모델을 만들고 가지고 놀면서 스토리에 대한 상상을 펼쳐보고, 프라모델을 똑같이 그려 본다고 며칠 밤을 세기도 하고, 친구들과 프라모델에 대한 얘기로 맞다 틀리다 왁자지껄 놀던 추억들이 서서히 소환되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대한 친구들도, 장난감들도 아련함으로 다같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애착 인형 같았던 애착 건담 모델들이 막 떠오르고, 다루는 게 서툴렀던 유년기라 부서지고 망가짐에 본드로 떡칠하여 살리던 소동부터, 당시 가장 비싼 모델을 가지고 있던 친구네 집에 그걸 보기 위해, 조금이라도 만져보고 싶은 욕심에 매일같이 찾아갔던 기억들 말이다. 학교 앞 문방구 앞에는 ‘건담 대전집’ 같은 소책자 형태의 일본 백과사전의 번역본을 팔았는데 그 책을 밤새 닳도록 읽고 따라 그림 그렸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다가왔다. 압박감이 가득했던 대학-취업 시절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일하는 직장 생활 속에서 나는 건담에 대한 존재 자체를, 취미 자체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 그래. 나는 그때 정말 행복했구나. 정말 즐거웠구나. 상상으로 가득했구나. 내가 정말 건담을 좋아했었지! 왜 그것을 잊었을까’ 조금 오버에서 표현한다면 잃어버렸던 보물을 우연히 다시 찾은 느낌이었다.
일터에서 신입을 거쳐 조직에 적응하고, 사업도 이해하면서업무의 스펙트럼이 한창 넓어지는 시점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 생활을 함께 해 온 선배네 가정에 오랜만에 놀러 갔다. 가족들과 즐거운 식사 후 담소를 나누다가 선배의 한쪽 방에 가득 메워져 있는 건담 상자들과 건프라들을 보고 다시 건프라에 대한 마음에 열정이 타올랐다. 선배와 함께 하나하나 꺼내 보면서 건프라와 연계된 스토리들을 얘기해 갈 때의 행복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마 선배도 나 때문에 그것을 다시 꺼내보면서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는 건프라를 소유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너머에 있는 추억과 경험을 동시에 보는 사진 앨범과도 같았다.
이후부터는 일본을 갈때마다 애착 건담을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건프라를 구매하면서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구나’, ‘정말 제품 자체가 많이 좋아졌네!’ 한국 제품만 알았는데 현지에서 제조된 브랜드를 보니 놀랍기도 했다. 어릴 적 소유했던 키트보다 훨씬 퀄리티가 좋아졌고, 프라모델 시장의 성숙으로 인해 다양한 버전과 크기, 디테일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어릴 적 '건담 대전집’은 절판되어 없지만, 그에 준하는 새로운 버전들의 건담 백과 및 월간지를 찾아 하나씩 구매하는 재미도 즐겼다. 일본 여행 중 시간 될 때마다 서점에 들어가 보물 찾듯이 관련 서적을 뒤지는 것은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그림과 내용, 용어들은 기억하기에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프라모델을 사는 것도 흥분되고 즐거운 일인데 애니메이션, 코믹스랑 연계된 자료들을 모으고 알아가는 게 어릴 적 향수랑 맞물려 상당히 행복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하나둘씩 좋아하는 건프라를 사서 만들면서 어릴 적 느꼈던 겜성도 느끼고, 추억도 되짚어 보는 재미는 일로 가득한 스트레스를 잠시 잊게 해 주는 취미가 되었다. 나는 반다이에서 기획된 건프라 자체를 좋아해서 도색을 하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상상을 구현하는 커스텀을 위해 도색을 하면 좋겠지만 아직 시간적-상황적 시도는 어렵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모멘텀으로, 나는 일하면서 건프라를 취미로 다시 접목하게 되었고, 휴일이나 휴가에 건전한 취미 생활로 나의 인생에 주요한 취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위에 언급한 일련의 모멘텀들로 인해 나는 이제 완연히 건덕후가 되었다. 특히, 받고 싶은 선물이 있냐는 질문에 답은 항상 “건담”이라고 답한다. 다른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일터의 동료들이나 친구, 지인들이 종종 묻는다. 너무 고가의 취미 생활은 아니냐고. 전혀 아니다. 5~10만 원 정도 하는 MG(master grade : 성인 대상의 키트) 제품을 구매하면 나의 경우 대략 6~7시간 정도 걸린다. 주말과 휴일에 1~2시간씩 나눠서 팔다리 등 부분적으로 조립하면 대략 1.5개월에서 길게는 3개월까지도 걸린다. 거기에 디테일을 살리기 위한 스티커(일명 데칼)들을 부착하는대도 최소 1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본다. 즉, 하나의 건프라를 완성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고가의 취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다. 5만 원짜리 건프라 하나를 만드는데 총 5시간이 걸린다면 평균 1시간에 1만 원 꼴의 취미 생활과도 같은 상황이다. (참고로 ver.KA 버전을 구매하면 스티커 부착은 다른 킷보다 2~3배 시간이 걸린다.) 물론, 리미티드 제품이나 메탈 재질 같은 특이한 제품은 당연히 2~3배의 가격으로 프리미엄 급 가격이다. 그런 제품을 구매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 상황이라고 본다. 어떤 취미든 기준을 넘어 쏠림 현상은 당연히 발생될 수 있고,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경제상황(엄격히 말하면 용돈 생활)과 시간, 상황에 맞는 균형 안에서 이뤄져야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사안으로 본다.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이 취미 생활은 눈에 완연히 보이고 결과물이 평생을 함께 하는 취미이다.어린아이들이나 애완동물들이 망쳐 놓지 않는 한 진열해 놓은 나의 건프라들은 나와 평생 함께 한다. 진열된 각 모델들을 서재 책상에 앉아 지긋이 바라보면, 그 건프라 모델과 연계된 스토리와 상상들이 나를 사로잡게 되고, 즐거운 마음이 가득한 힐링으로 흐뭇해진다. 이런 것이 힐링 아닐까? 실제 내가 회복과 대안,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문제들은 다른 방법으로 힐링할 수 없다. 그것은 온전히 그것의 문제를 푸는 것으로만 힐링된다. 건프라로 지친 나의 마음과 생각을 리프레시하고, 즐거운 상상으로 생각의 리부팅을 하게 되면서 결국 힐링을 하고자 하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번 주말에도 지난주부터 만들고 있는 건담을 꺼내어 만들면서 그 건담의 책자들을 꺼내서 읽어 볼 거다. 일본어는 잘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