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중간즘]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돌아보는 우정
- <프렌즈>, 로빈 던바
본격적으로 일하고 있던 30대 시절에는 거의 친구들을 만나기 힘들었다. 뒤늦은 대학생 생활에 성적이든 배움에 대한 완성도든 최고로 끌어올리고 싶었다. 난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지만 외국의 대학생들과 경쟁한다는 마음가짐이어서 절정의 경험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상황적으로 학업만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자주 입원하시던 상황이었고,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일도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일과 간호 그리고 학업 생활로 하루 3시간씩 자면서 지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다. 학업-아르바이트-아버지 간호, 이 세 가지 사이클에 숨 쉴 여유도 없었던 상황인지라 자연스럽게 친구들 모임에 참여하기 힘들었고 어느 정도 친구관계는 놓치고 살았던 것 같다.
"야, 너 술 안 마시지? 나 마포에 있으니 저녁에 커피 한잔 하자. 일 끝나면 전화해."
결혼하고 40에 접어들 즈음이 되니까 친구 중 몇몇이 먼저 연락을 주었다. 나는 친구들 모임에는 거의 못 나가서 나를 모두 잊지 않았을까 생각했기에 먼저 연락 준 친구들이 고마웠다. 대학 졸업 전부터 시작된 직장 생활은 재미있기도 했지만 난이도 높은 테스크로 인해 고군분투의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더욱 친구들과의 연락은 소홀했다. 그런 와중에 나를 기억해 준 몇몇 친구들이 고마웠다.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에 나갈 때 기대감도 생기고, 신선한 이벤트에 설렘도 찾아왔다.
내가 친구들을 못 만나던 사이에 친구들도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일터에서 많은 일을 겪었다는 것을 알았다. 20대의 친구들은 못 보던 사이 순식간에 40대 중반에 도달했다. 탈모를 겪는 친구들도 생겼고, 나처럼 체중이 늘어 외형이 바뀐 친구도 있었다. 몇몇 친구들에게 종종 개인마다의 소식은 전해 들었으나 잘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하나, 둘 그리고 다 같이 보게 되는 친구들은 친구별 업데이트들로 나름 버퍼링이 생길 정도로 시간은 그렇게 많이 흘렀던 것이다.
친구들의 부모님 장례는 이런 나에게 큰 모멘텀이 되었다. 코로나 19 기간의 장례는 장례 문화에도 새로운 영향을 주었다. 감염병 때문에 거의 찾아오기 힘든 장례장에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하나, 둘씩 합류하는 친구들을 볼 때 반갑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다. 나의 긴 공백기를 다그치는 친구도 있었다. 100% 맞는 말이기에 쑥스러움과 미안함에 사과와 함께 서로 크게 웃었다. 아이는 몇 명이니, 전에 다니던 회사는 그대로 다니니, 어디 사니... 기본적인 업데이트 사항부터 서로 확인한다. 그리고는 어릴 적 우리들의 이야기로 서로 튜닝을 한다. 멋쩍고 쑥스럽지만 행복한 기억들로 다시 우리들은 친구들임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장례식장이 저녁 늦은 시간부터는 온전히 우리들만의 공간이 되었다.
술잔을 기울기며 밤새 그동안의 얘기들로 자리 뜰 여력이 없었다. 상실감으로 괴로움이 가득한 친구를 옆에 두고 위로하며, 이전의 스토리들로 서로를 되찾는 시간 속에서 굉장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모두들 정말 그 자신 그대로를 살았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친구들을 못 보았지만 그 자리 그대로에서 자기네들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한 번도 관계를 끊었다, 또는 잊혔다가 아닌 그동안 서로 못 보았다의 뜻이었다. 나도 내 자리에서 바둥바둥 살아왔는데 나만 잊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친구들이 겪은 20~30대 인생은 달랐지만 내가 아는 그 친구들 그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래서 장례장의 그 하루를 통해서 우정이라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의 관계라는 것을 깊이 체감하게 되었다.
친구란 '우연히 술자리나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 동석해도 부담이 없거나 당혹스럽지 않은 관계'라고 인터넷 서핑 중우연히 봤다. 깊이 공감되면서 조금 덧붙이자면 어디서 만나든, 언제 만나든 친구 관계는 공감의 자리, 그 자리에서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모두를 위한 자리에 다소 소홀했던 나의 태도를 반성했다. 남은 후반전은 어릴 적부터 쌓아 올린 우리들의 공감의 경험과 시간들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왜? 정말로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