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소년의 상처
내가 15살이 되던 해 중국에서 거주하던 나는 아버지의 사업이 급격하게 안 좋아져서
도망치듯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당시 아버지, 나, 동생은 돈이 없어서 고모네 집에 얹혀살았다.
고모네 집에는 이혼한 고모의 남자친구, 고모의 딸, 고모 이렇게 세 명이 방 두 칸짜리
반지하 집에서 살고 있었다.
고모의 남자친구는 야구 선수 출신에 덩치는 곰 같았고, 등에는 엄청난 문신이 있었다.
그 남자는 술을 먹으면, 자기도 못 배운 주제에 나를 나무라며 멱살을 잡고 들어 나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무기력한 샌드백처럼 흠씬 두들겨 맞고, 입에서는 피가 났다.
그 장면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고모는 "가서 피 닦아"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이런 일은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있었다.
나는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에 전학을 가게 되어 학교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짱꼴라"라고 부르거나,
친한 사람이 없으니 왕따 비슷한 것도 경험했다. 아니 왕따였다.
그래도 다행히 중국에 있을 때 키워놓은 운동 신경과 약간의 주먹질 경험이 있어서
아예 맞고 다니는 정도는 아니었다.
맞고 다니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철없는 짓을 많이 하고 다니기는 했다.
같이 중국에서 지냈던 친구에게 가서 돈이 없으니 입던 옷을 바리바리 가져오기도 했고,
치고받고 싸우다가 상처가 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벌어졌다.
담임 선생님이 우리 집에 전화를 했고, 내가 요즘 안 좋은 친구들하고 몰려다니는 거 같은데
주의를 주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던 것 같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알루미늄 야구 배트를 가져오셨고, 나는 그 야구 배트로 흠씬 두들겨 맞겠구나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그 배트로 나를 때리시진 않았다.
그런데, 술이 잔뜩 된 아버지는 들어가서 주무시는데 문신이 가득한 "삼촌"이라는 작자는 매타작을 준비했다.
그 남자는 나를 작은 방으로 끌고 들어갔고, 이럽션의 one way ticket을 마치 히어로물의 등장 OST 라도 되는 거처럼 크게 볼륨을 키우고 매타작을 시작했다.
"거짓말 한 개당 100대다." 나는 있는 말 없는 말 다 끄집어내서 모든 걸 사실대로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 맞아야 되는 숫자는 늘어났다.
야구선수에게 야구배트로 60대 정도를 맞았다. 이쯤 되니 더 맞을 바에 그냥 머리를 맞고 자살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내가 처맞고 있는데 우리 가족은 뭐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과 원망이 들었다.
나는 그만 맞고 싶어서 왼손으로 막았다. 야구배트가 왼손을 강타하자 연약한 내 손등의 뼈는 부러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엎드려야 하는데 도저히 겁이 나서 엎드리질 못하자 손수 내 발목을 강타해주셨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엉덩이는 이미 감각이 사라진 듯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문을 열어 주셨고, 나는 그 틈을 타서 계단 밑으로 쏜살같이 도망을 쳤다.
죽어라 달렸다. 내 앞을 가로막는 벽이 있으면 벽을 타고 넘어갔다.
부러진 손등의 뼈의 고통이 느껴졌다. 어느 빌라 구석에 바퀴벌레처럼 쭈그리고 앉아 숨죽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너 누구야!?"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제발 조용히 해주세요. 조용히 있다 가겠습니다."
내 상처를 보고 놀란 아저씨는 경찰에 신고를 하셨다.
나는 그렇게 지구대로 가게 되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급하게 달려온 고모가 내가 하는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일관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뻔히 그 방문 앞에서 술 마시면서 담배 피우는 걸 분명히 봤고,
그렇다면 그분도 분명히 그 상황을 지켜봤을 텐데..
이쯤 되면 온 가족이 나를 때려죽이려고 작전을 세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관인 건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 "삼촌"이라는 작자가 아무 처벌도 없이 나는 그냥
아주 단순히 작은 매타작으로 인해 조금의 피해를 본 그런 사람으로 사건이 끝났다는 사실이다.
너무 비통하고 화가 났다.
나는 그렇게 처맞은 "삼촌"이라는 작자가 누워있는 그 집에 다시 돌아가 잠을 청해야 했다.
퉁퉁 부은 엉덩이와 걷기도 힘든 발목을 겨우 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