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0월 15일. 콜롬비아에서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슬슬 다음 나라로 넘어가야 할 것만 같은데…. 지도를 꺼내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를 뽑으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 ‘칼리’가 코앞이었다. 이 나라의 마지막 목적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칼리를 들르면 대형 버스를 타고 에콰도르와의 국경 언저리까지 편하게 도착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고 말이다.
그렇지만 이놈의 해먹 로망. 칼리와는 정 반대 방향이지만 지금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거대한 사막지대가 있었다. 찾아보니 사막 안의 한 호스텔에서 평범한 이층침대대신 해먹을 마련해둔 덕에 쏟아질듯한 별들을 지붕 삼아 잠에 들 수 있다고 한다. 지난주 국립공원에서 보냈던 해먹에서의 하룻밤이 여전히 생생하게 반짝이는 기억이기에 이 장소를 애써 모른 체하며 그저 대도시로 향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발길은 사막으로 향했다. 이름조차 통통 튀는 ‘타타코아 사막’으로. 비록 이후에 국경으로 향하는 길이 몇 배로 험난해지지만 너무 멀리까지 바라보면 당장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기에 그저 오늘만 생각하며 결정지었다.
'오늘 밤 행복하면 된 거야.'
역시 대단한 걸 보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가 따라야 하는 건지 사막으로 향하는 길부터가 난관이었다. 이곳 살렌토에서 네이바라는 이웃 마을로 향한 뒤 그곳에서 또 소형 버스를 타고 이후 지프차까지 타야 사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동시간만 한나절이 걸리는 셈이다.
다행히 버스 환승은 어렵지 않았다. 자그마한 동양인 여자아이가 몸집 만한 가방을 이고 버스에 오르니 탑승과 동시에 모두에게 시선집중을 받았다. 그들은 괜히 앞쪽 좌석을 양보하며 어디까지 가냐고, 네가 내릴 곳을 기사에게 전달해 주겠다며 도움을 자처했다. 지도를 보여주며 여기 언저리까지 가야 한다고 말하는 내 주변엔 어느새 세네 명의 사람이 모였고 아주머니는 기사님께 아이를 정확한 장소에 내려 주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덕분에 세 대의 버스를 갈아타는 동안 길을 잃을 일이 없었다.
안전히 마지막 버스에서 내려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사막 안 호스텔까지 바래다줄 지프차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내 바로 뒤, 버스 정류장부터 계속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는 여자아이가 자꾸 신경 쓰였다.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저 크기의 배낭을 메고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여행자일 테다. 왠지 나와 목적지가 같을 듯한 느낌이었다. 슬쩍슬쩍 그녀를 쳐다보다가 결국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런데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은 소심하게 굴던 나와 달리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다.
“혹시 너도 사막에 가는 길이니?”
사실 정규 버스편과 달리 기사와 직접 흥정을 해서 탑승해야 하는 지프차는 아무래도 조금은 겁이 났었는데, 적절한 타이밍에 동행이 생겼다.
지프차 안에서
그녀의 이름은 알루(Alu). 루마니아에서 왔고 현재 나처럼 편도 비행기 티켓만을 가지고 있어서 하루하루를 여유로이 보내고 있다고 한다.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에도 능해 순식간에 인상 좋은 기사님 한 분을 모셔왔다. 함께 사막 한 바퀴를 돌아보고 난 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해먹이 있는 호스텔, ‘Noches de Saturno (토성에서의 밤)’ 앞까지 데려다주시기로 했다. 호스텔 이름이 자그마치 토성의 밤이라니. 정말 낭만의 끝이다.
기사님은 호스텔로 향하는 길에 사막을 대강 스쳐가는 게 아닌 중간중간 차를 세우고 함께 걸으며 지형에 대해 설명도 해주시고 우리들의 사진을 찍어주시기도 했다.
내게 사막이라 하면 드넓은 모래벌판이 가장 먼저 떠올랐었는데 이곳은 그러한 모래 지형이 아니었다. ‘타타코아(뱀)’라는 사막의 이름에 걸맞게 길고 꼬불꼬불한, 또 건조함에 잔뜩 갈라지고 단단히 뭉쳐져 늘어진 흙덩이들이 마치 뱀처럼 보였다. 인생에서 사막은 처음인데 게다가 이렇게 독특한 지형의 특별한 사막이라니. 알루와 나는 40도가 넘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알루와 나는 통하는 게 많았다. 여행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그녀는 심지어 2년 전 서울 여행을 왔었다며 내게 남산타워와 인사동 사진을 보여주었다. 앨범을 쓱쓱 넘기다 경복궁 앞에서 한복을 입은 사진이 나오자 그녀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이 가장 아낀다는 사진 속 미소와 지금 이 순간 짓고 있는 미소가 똑 닮아있단 사실을 그녀는 알까. 귀여워라.
한 시간여 사막을 돌아보고 난 뒤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호스텔 앞에 도착했다. 40도의 열기 속을 한참 동안 걸어서 일지 무척이나 허기진 배에 체크인 후 허겁지겁 호스텔에 딸린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사막을 돌아보며 곳곳에 염소들이 자유로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그래서일지 메뉴판 속 첫 번째 메뉴는 염소고기구이였다. 알루와 나는 다른 걸 더 둘러보며 고민할 것 없이 같은 메뉴 두 개를 주문했다. 사막에서 자란 염소의 고기라니! 입맛이 절로 돌았다.
사막을 자유로이 뛰어다니던 염소들 그리고 염소고기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배정받은 해먹에 누워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했다. 다소 더운 바람이었으나 오히려 기분은 더 좋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정말로 사막 한가운데에 누워있단 증거인 것만 같아서 말이다.
고개를 돌려 옆 해먹에 누워있는 알루를 바라보니 그녀는 자꾸만 자신의 허리를 꾹꾹 마사지하듯 누르고 있었다. 늘 가방 안에 넣고만 다니던 파스가 드디어 빛을 발할 때가 됐구나!
“알루, 너 코리안 매디슨 써볼래? 스티커 같은 건데 그냥 붙이기만 하면 돼!”
당연히 알루가 파스가 무엇인지 전혀 모를 거라 예상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대며 대단한 물건인양 두 개를 꺼내 건넸으나 그녀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나 이거 알아! 한국에서 기념품으로 사 갔었어!”
놀라웠다. 일본의 동전 파스처럼 한국 역시 여행 기념품 목록에 파스 따위가 있는 걸까? 써본 적 있다는 그녀는 익숙하게 자신의 통증 부위에 파스 하나를 붙였다. 고맙다며 또다시 그 환한 미소를 보인다.
우리의 아이스브레이킹은 파스로 인해 이루어졌을까,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젖어들었다. 나의 유럽여행 이야기, 알루의 한국 여행 이야기, 그리고 각자의 콜롬비아 여행기 등 서로 나이도 국적도 크게 달랐지만 공통된 관심사로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사막을 구경한 뒤 칼리로 이동해 머무르려던 계획을 무르고 나와 함께 에콰도르로 넘어가기로 했다. 방문한 도시 하나를 더 늘리는 것보단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하는 게 더 소중하다며.
결국 콜롬비아의 가장 마지막 도시에서까지 다른 이와 함께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과연 ‘혼자서’하는 남미 여행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무계획이며 즉흥적인 나의 여정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또 지나치게 아름다운 풍경들을 함께 보고 나눌 수 있던 이들이 늘 곁에 있었음에 감사한다. 이번에도 내 옆의 알루가 아니었다면 그저 덥고 지루하기만 했을 사막 속 시간이었을테다.
불빛이라곤 하나 찾기도 어려운 사막에서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별들이 진해지기 시작할 때쯤 호스텔에서 소개해 준 천문대 투어를 나섰다. 지금까지도 셀 수 없는 별들을 봐왔다 생각했으나 사막 안의 별은 차원이 달랐다. 고개를 빳빳이 치켜세우고 한참을 바라보다 그냥 바닥에 대자로 드러 누웠다. 이에 질세라 알루도 내 옆에 함께 누워주었다.
까만 도화지에 백설탕 한 봉지를 남김없이 흘려 놓은 듯 빈틈없이, 쉴 새 없이 반짝이던 것들을 바라보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눈에만 담기엔 아까운 광경이기에 마음속 깊숙히 선명하게 담아두고 싶었다. 눈을 감고 계속해서 밤하늘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마침내 눈을 감고도 오늘 밤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딱딱한 바닥, 차가운 저녁 공기, 도란대는 주변인들의 낮은 목소리, 사막 전체를 밝혀주는 하늘 위의 불빛들.
이렇게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지났다. 이제는 정말로 콜롬비아를 떠날 시간이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