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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는 여행 중 Feb 02. 2022

콜롬비아에서 카우치 서핑을?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헤이! 진!!!!!!”


광장 한복판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콜롬비아에서 대체 누가 나를 안다고? 그럴 일이 없는데, 대체 누가? 이상한 기분에 주변을 두리번대며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저게 누구지? 길의 끝자락에서 양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저 사람은…. 스테파니잖아!


바로 어제 함께 비 맞으며 트레킹을 마쳤던 스테파니와 그의 사촌동생 디에고가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헥헥대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어제 연락처 하나 못 물어본 게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이렇게 다시 마주쳐서 진짜 다행이다. 지니, 오늘 뭐해? 우리 이모집에 가자!”


때는 오전 열 시를 겨우 넘긴 시간. 간단히 호스텔 조식을 먹고도 배가 고파 카페를 찾아 나서던 길이었다. 사실 오후에는 살렌토 마을에서 유명하다는 커피 투어를 가려던 참이었으나 기대에 차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망울을 모른 채 하긴 쉽지 않았다.


“이모집? 여기 살렌토에 사시는 거야?”


“아니, 그렇지만 가까워! 여기서 한 시간이면 가! 거기엔 유명한 온천이 있어. 같이 가자!”


그게 가깝다니. 콜롬비아인에게 한 시간은 그저 십, 이십분으로 느껴지는 걸까.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까지의 찰나의 순간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아직 살렌토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삼일 정도. 미리 결제해 둔 호스텔은 이 박 어치. 일 박당 가격은 오천 원. 단돈 오천 원. 그래,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마주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연인데 그깟 돈이 대수일까. 그래, 가보자.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이던 언덕 위 호스텔 내 침대


이제 예약해둔 호스텔을 버리는 일은 아주 간단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방으로 돌아가 간단히 씻을 도구와 잠옷만을 챙겨 나왔다.


스테파니의 말대로 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길 내리 신이 잔뜩 나 조카 사진, 이모네 동네 사진, 온천 사진 등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녀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들을 처음 만난 살렌토도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던 작은 마을이었으나 이모의 집이 있는 산타로사는 더더욱이 그러했다. 아시안이라곤 마을 전체에 나뿐인듯했다.

동네의 분위기를 보고 어느 정도 예상되었다시피 역시 이모에게도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한국인이었다. 그녀는 양팔을 크게 벌리며 나를 반겨주셨다.

장기 여행으로 인해 피부며 머리칼이며 이미 거칠게 상했고 온몸은 가지각색 상처들로 엉망인 꼴이었지만 이모는 이러한 내 모습에도 끊임없이 칭찬만을 내뱉으셨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의 직업은 놀랍게도 네일 아티스트였다. 직접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남미’하면 페루나 볼리비아의 형형색색 화려한 무늬의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아낙네들만이 떠올랐었기에 실제로 이곳에서 깔끔히 차려입은 도시 여성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됨에 크게 놀랐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작디작은 시골 마을에도 전문 네일 아티스트가 있단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느꼈다. 얼마나 편협적이고 또 인종차별적인 마음이었나. 내 생각의 폭을 넓히게 되는 기회를 만나고자 떠나온 여행이었기에 크고 작은 놀라움들은 내게 기쁨을 준다. 이번에도 또 하나 배웠구나.


그녀는 내 작고 예쁜 손에 네일아트가 없어선 안된다며 급히 작업대를 꺼내왔다. 하얀색,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그녀의 손은 이색에서 저색으로 바쁘게도 움직였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새까맣게 타고 주름져 보기 흉하던 내 손끝에 색색깔 꽃잎들이 가득 그려졌다. 남미에서의 네일아트라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Qué Lindo! Muchas gracias!” (이거 완전 맘에 든다! 정말 고마워!)


다음은 스테파니 차례였다. 그녀의 손에도 색색깔의 꽃들이 빠르게 피어났다.


이모의 솜씨를 넋을 놓고 바라보다 보니 문득 현관 자물쇠가 덜컹대는 소리가 났다.

철컥-.

나를 제외한 세 명의 사람이 입을 모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펠리페!”


앗, 펠리페라면 아까 버스를 타고 오는 길 스테파니가 끊임없이 사진을 보여주었던 그 귀여운 아이인걸!

이제 막 처음 마주했지만 이미 사진으로 많이 봐서일지 그를 향해 느껴지는 묘한 익숙함에 나 역시 큰소리로 ‘Hola! (안녕!)’를 외치며 반갑게 맞이했다.


초등학생인 펠리페는 이제 막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언니오빠들은 곧 온천에 갈거란 엄마의 말에 펠리페는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오른팔을 높게 들며 나도! 나도! 를 연신 외쳤다. 그렇게 온천 멤버는 모두 넷이 되었다.


이모는 긴 시간 외출에 혹시라도 시장할까 집을 나서는 우리의 손에 샌드위치를 하나씩 쥐어주셨다. 한 손엔 샌드위치 한 손엔 카메라를 들고 이 작고 평화로운 마을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놓칠까, 걸음걸음 셔터를 누르며 온천을 향해 걸었다.

펠리페는 학교에서 배웠다는 동요를 흥얼거렸다. 그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산책로를 걷는 기분은 완벽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좋았다. 이 마을에 오기로 선택한 스스로에게, 또 나를 초대해 준 스테파니와 디에고에게 마음 깊이 고마움이 느껴졌다.



머지않아 마주하게 된 온천의 규모에 다시 한번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콜롬비아의 온천이라면 뻔한 모습 일 거라 상상했던 스스로가 너무도 창피해졌다.

마치 영화 '센과 치히로'에 나올 법한 단정한 일본 스타일의 천연 온천이었다. 내부는 나무 결을 그대로 살린 깔끔한 인테리어에 여러 개의 탕들이 온도별, 깊이별로 잘 나누어져 있었고 온천탕들 바로 뒤로는 수백 미터 높이의 산꼭대기부터 떨어지는 폭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정말 현지인들만 아는 곳인지 내부엔 콜롬비아인들로 가득했다.

늘 8인실 이상 규모의 호스텔에서 잠을 자고, 먹고 싶은 음식보단 금액을 고려해 끼니를 때우고, 빨래방에 가는 돈조차 아까워 매일 손빨래를 하는 짠 내 나는 여행 중이던 내게 오늘 밤 이 온천은 큰 위로가 되었다. 그간 수고했다고, 그래서 이렇게 좋은 날이 왔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저녁시간에 도착한지라 핑크빛 노을부터 하늘을 가득 채우는 별빛까지 모두 즐길 수 있었는데 어쩌면 내리 하늘까지 이토록 맑은지. 온 세상이 내 편인 기분이었다.


뽀송해진 몸으로 집에 돌아가니 이모님은 우리가 언제쯤 도착할지 예상했다는 듯 딱 먹기 좋게 따듯한 온도를 유지한 콜롬비아의 가정식을 단정히 차려 놓으셨다. 나의 몫까지 말이다.

나는 당신의 조카도, 긴 시간 알고 지낸 지인도 아닌데. 그저 몇 시간 전 처음 마주한 이방인일 뿐인데. 서로 다른 언어 탓에 손짓과 몸짓을 섞어가며 대화해야 하는, 그런 사이인데. 왜 때문에 이들은 나를 이토록 정성으로 대접할까. 과연 나였다면 단 하루를 머물고 갈 외국인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이들처럼 없어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을, 현 상황이 어떻든 그저 미소 짓는 모습을 닮고 싶다.


나와 함께한 오늘 하루를 이들은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나는 이곳에서의 하루를 정말 긴 시간 그리워할 테다. 내 손끝에 그려진 예쁜 꽃잎들이 모두 지워진다고 한들 오늘 하루가 잊힐까.

침대에 누워 홀로 이런저런 공상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스테파니는 나를 한 번 더 챙긴다. 방이 조금 춥지 않냐며 이불을 하나 더 꺼내다 주었다.


다행히 이들도 오늘 하루가 내가 느낀 만큼 특별했나 보다. 곧장 잠에 빠져 내일이 되어버려 헤어지게 되기 전 오늘을 조금 더 늘리고 싶다며 그들은 늦은 밤 다시 형광등을 켰다. 한글을 조금 배워보고 싶다는 그들.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반듯한 글씨로 또박또박 그들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안녕. 스테파니, 디에고, 펠리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일은 어디서 눈을 뜰까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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