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치 않은 하늘빛. 아침 여섯시가 꼭 저녁 여섯시 같은데 여섯 시간짜리 트레킹을 기어코 오늘 가야만 하겠는가.
이 주간 콜롬비아의 북부 카리브해 언저리에 머무르다 드디어 다시 대륙 한가운데로 돌아온 참이었다. 내 키의 가히 열 배가 넘는 길이의 야자수 수백 그루가 마치 이쑤시개처럼 산에 콕콕 박혀있는 모습의 사진 하나만 보고 반해 냅다 버스에 올라 도착한 마을, 살렌토.
끝에서 끝까지 여유로이 걸어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아담한 규모의 마을이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한가로이 산책을 마쳤음에도 시곗바늘은 여전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두터워지는 구름에 굳이굳이 오늘 트레킹을 가야만 하는가 고민이 되었지만 사실 ‘내일’ 날씨는 좋을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남미 기상청 못 믿어!) 예정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트래킹 장소로 향하기 위해 콜렉티보 (남미에서 흔한 이동 수단으로 일종의 소형 버스)를 잡아탔다.
"Valle del Cocora, por favor!" (코코라 계곡이요!)
목적지를 말한 뒤 유난히 젊어 보이는 커플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젊은 커플은 소매치기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았던, 그간 느껴온 나만의 통계 속에서, 나름대로 안전한 자리를 찾아 앉은 셈이었다. 그들은 둘만의 이야기에 빠져있다가도 자꾸만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곤 했다. 아시안으로서 흔하게 겪는 일이니 여느 때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De dónde eres?"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
간단한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출신부터 묻다니. 다분히 무례함을 느낀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Porqué? Soy de Corea." (한국인이다, 왜!)
그런데 나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환호를 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이유였다.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 바로 나란다. 그녀는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나의 부족한 스페인어에도 불구하고 말끝마다 물개박수를 치며 과분한 리액션을 해주었다. 우연이 인연이 될 운명인지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같았다. 그들 역시 트레킹을 하러 가는 길이란다. 낯선 공간에서 같은 정거장에 내릴 친구가 생겼음에 마음이 크게 놓였다.
남녀가 함께 있으매 의심 없이 커플이리라 예상했으나 그들은 사촌지간이었다. 영어를 조금이나마 하는 그녀, 스테파니와는 달리 옆자리의 사촌동생 디에고는 오직 스페인어만 할 수 있었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대화하는 우리 옆에서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우리를 바라보던 디에고. 직접 많은 말을 나누진 못했지만 그의 따듯한 마음씨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던 미소였다.
시간이 지나 버스는 길목에 끼익- 큰 소리를 내며 정차했고 버스 안내원은 소리쳤다. "Valle del Cocora! (코코라 계곡이요!)"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고 나면 좋은 여행하라며 인사하고 자연스레 흩어지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들은 내 옆에 바싹 붙어 계속 말을 걸어왔다.
다른 건 몰라도 트레킹만큼은 혼자 하는 걸 선호하는 나는 누군가와 함께하게 됨에 꽤나 피로감을 느꼈다. 남들보다 걸음이 느려서 억지로 다른 이의 속도에 맞춰 헥헥대며 뛰듯이 걸어야 하는 것도 싫고, 누군가의 말소리 대신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 소리에 집중하고 싶고, 맘에 쏙 드는 풍경 앞에서 눈치 보지 않고 긴 시간 앉아 머무르고 싶기에 혼자 걷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고 만난 지 삼십여 분 된 이들과 여섯 시간을 함께해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불편한 마음에 일찌감치 입구에서부터 멀어지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진을 좀 찍고 가려고! 먼저 올라가 :)"
저렇게 말하면 당연히 먼저 출발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러게! 여기 너무 예쁘다, 우리 ‘같이’ 사진 찍고 가자!" 결국 셋의 얼굴로 가득 찬 셀카 한 장을 남기게 되었다. 이게 아닌데…. 그렇지만 도통 이 상황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겠지. 그래, 그냥 현지인 가이드와 함께한다고 생각해 보자.
실제로 그들은 내게 주변의 경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었다. 이 새의 이름은 무엇인지, 저 산은 왜 저렇게 뾰족한 건지 등. 근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디에고는 이곳 지형에 대해 해박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걷다보니 문득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톡 토독. 비의 시작이었다. 흐린 하늘에 어느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굵은 빗줄기에 처마 밑을 찾아 뛰었다. 다행히 머지않은 곳에 몸을 가릴만한 공간이 있었고 그곳엔 이미 두 명의 사람이 비를 피하고 있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게 됐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왔다는 두 친구들. 여행을 많이 해봤는데 아직 한국은 가보지 못했다며 간단한 한국어 인사를 배우고 싶어 했다. ‘안녕’을 알려주자 소리가 꼭 ‘Onion’같다며 밝게 웃는다.
그러더니 한글 이름이 뭐냐고도 물어온다. 외국인들에겐 발음이 어려운 '혜진'이라는 실제 이름 대신 늘 '지니'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곤 했는데 기어코 제대로 불러주고 싶다며 하우징, 애징, 헤이진, 하이쥥 등 최대한 비슷하게 소리내보려 열댓 번을 반복하는 모습들이 너무도 귀엽고 고마웠다. 이렇게 한국어로 고작 몇 마디 나눴다고 마음이 활짝 열려버려 그들과도 함께 남은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혼자 걷는 걸 좋아한다던 내가 일행을 다섯 명이나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이게 내 상상과는 다르게 나쁘지가 않았다. 기껏 걸으러 왔는데 비가 온다며 우울해질 만도 한 상황이었으나 친구들은 그런 기분을 느낄 새를 주지 않았다.
잔뜩 어두운 하늘 아래 왁자지껄한 친구들의 목소리는 밝은 기운을 내뿜었다. 무겁게 젖어가는 머리칼에도 서로의 몰골을 보며 깔깔대고 웃느라 추위조차 느낄 새가 없었다. 실제로도 가장 어리긴 했지만 키가 작은 내가 마치 아주 어린 동생처럼 느껴졌는지 끊임없이 챙겨주는 네 명의 언니 오빠들 덕분에 여섯 시간여의 트레킹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었다. 만일 혼자였다면 얼마나 궁상맞게 걷고 있었을지 선명히 떠오르는 상상 속 내 모습을 지우고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생각해 보니 사실 혼자서 여행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우연찮게도 대부분의 시간에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 시작은 혼자였지만 결국 다섯명이 되어버린 오늘처럼.
지구 반대편에서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날 동안 한치의 외로움도 느낄 수 없도록 감정의 빈틈들을 채워주던 사람들. 그렇게 채워진 틈들이 너무도 완벽해 그게 얼마나 큰 보탬인지도 몰랐던 존재들. 이제서야 지나쳐간 동행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함이 느껴졌다.
혼자 걷고 싶다는 괜한 고집에 내 뒤를 따라오던 스테파니에게 툴툴대던 아침의 내가 떠올랐다. 그녀의 첫 번째 한국인 친구로서 더 잘해주지는 못할망정…. 미안함에 한 번 더 그녀를 두 팔 벌려 꼬옥 안아주었다.
평소 그토록 싫어하는 비 오는 날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래서 하루를 망친 날이 아닌, 덕분에 동행의 소중함을 깨달은 특별한 날이다.
비록 여행자 신분인 우리들은 오늘 하루 얼마나 즐거웠던 그저 안전한 여행길 되라며, 기약 없는 안녕을 해야만 하지만.
비록 서로 다시 마주할 날은 오지 않더라도 함께 찍었던 사진과 영상들 자주자주 돌려보며 이 작은 마을을 떠올릴 때면 언제든 함께 생각날 너희의 이름과 장난기 어린 얼굴들을 결코 잊지 않을 거야. 언젠가 다시 마주한다면 '어니언!'을 외치며 활짝 웃어주고 싶다. 너희도 앞으로 어떤 한국인을 만나게 되건 첫 번째 한국인이었던 나를 잊지 않고 함께 떠올려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