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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는 여행 중 Aug 27. 2021

여행할 땐 아침형 인간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여행 중엔 아침형 인간이 된다. 설레는 마음 절반과 시간이 아까운 마음 절반으로 자연스레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제발 5분만, 5분만 더를 외치며 알람을 증오하던 서울에서의 나와는 정반대다.
 
조식이 준비되고 있다는 신호인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자명종 삼아 가뿐하게 몸을 일으킨다. 딱딱한 남미식 동그란 모닝빵에 버터, 딸기잼과 오렌지 주스뿐이지만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자리에 앉아 아무 걱정 없이 여유롭게 배 두드리며 먹으니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
매일 아침 루틴은 조식을 먹으며 구글 맵으로 동네를 쭉 살펴보기. 아침이 밝아오는 게 이토록 반갑고 설레다니, 일상에서도 이런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찬이 여덟 개나 되던 엄마의 진수성찬에는 그토록 지루함을 느끼던 내가 어째서 여행 중엔 사소한 모든 것들에 감탄하게 되는 걸까. 여느 여행에서처럼 또다시 결심해본다. 일상으로 돌아가도 이 마음을 잊지 말자고. 이번엔 정말 잊지 말자고.


한참 지도를 바라보다가 30여 분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오늘은 저기다!
카메라와 물병, 일기장 정도를 가방에 넣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워낙 한국인 방문객이 적은 콜롬비아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동네라 그런지 동네 사람들은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콜롬비아 일주일 차인 나는 그러한 시선들이 이미 익숙하다.

버스 출발 시간까지 아직 이십분쯤 남아있어서 근처 구멍가게에서 엠빠나다 (남미의 대표 길거리 음식) 하나를 샀다. 역시나 나를 빤히 바라보는 가게 주인. 익숙하다는 듯이 웃으며 그라시아쓰!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뒤돌아 나가려는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한마디를 던지셨다.


 ¡Eres la persona más bonita que he visto hoy!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오늘’본 사람 중 네가 가장 예쁘다니, 아침 열시에 사용하기 딱 좋은 멘트였다. 덕분에 기분 좋은 마음으로 오른 버스. 노래 몇 곡을 들으니 금방 바리차라 마을에 도착했다.



빨간 지붕과 하얀 벽으로 통일된 집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골목골목을 돌아보며 점심 먹을 만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까만 머리의 아시안 한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한국인인 것 같은데 말을 걸어봐야 하나 아니면 어쩌나 하며 망설이다 보니 그는 어느새 내 옆을 스쳐 지나가버렸다. 설마 아니었겠지 하며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니 그 역시도 뒤돌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동시에 나지막이 건넨 ‘혹시…?’

맞았다, 한국인이었다.
 
이런 산골짜기에 어떻게 한국인이 동시에 두 명이나 있을 수 있는 건지, 정말 신기했다. 동네에 총 몇 명이 있는지 셀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없는 작고 조용한 마을인데 그 와중에 한국인만 두 명이라니.
점심때인지라 자연스레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다. 지금은 방학을 맞아 주변을 여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둘 다 별다른 계획이 없던 탓에 함께 다니게 되었다. 그는 마을회관에서 나눠줬다는 종이 지도 한 장을 갖고 있었는데 대충 살펴보니 두 시간여의 짧은 트레킹을 거치면 옆 마을인 ‘구아네’로 향할 수 있다고 쓰여있었다.

여행을 길게 하다 보면 처음의 불타는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들기 마련인데, 이런 여행 속 여행은 다시 한번 깊은 떨림을 안겨준다. 계획에 없던 일은 언제나 신나기 마련이다.



구아네로 향하는 길 입구는 영화 ‘센과 치히로’의 첫 장면에서 가족들이 주차 후 걸어가던 터널의 느낌과 흡사했다. 구름 낀 하늘과 거칠게 부는 바람까지 말이다.
세 시간여를 걷는 동안 각종 새와 말, 소, 토끼, 당나귀까지 보았지만 사람은 단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 모든 풍경들이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삽화가 아름다운 동화책에 쏙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 길의 끝엔 거짓말처럼 무지개가 떠있었다. 우리가 이 마을에 도착함을 크게 환영받는 기분이었다.



바리차라 마을은 산힐보다 작았고, 구아네 마을은 바리차라 보다 작았다. 동네에 단 하나뿐인 작은 식료품점에 들어가니 계산대엔 새하얀 고양이가 하품을 하며 누어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으니 주인아저씨가 마을의 전통주라는 치차를 권하셨다. 그런 걸 놓칠 수야 없지, 바로 두 잔을 주문했다. 옥수수로 만든 진한 막걸리 맛이었다. 쌍엄지를 치켜세우는 우리를 보더니 본인도 갑자기 끌린 건지 한 잔을 따라 마시더니 ‘캬-'를 외치셨다. 역시 내가 만든 치차가 최고라며 한마디 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덕분에 한참을 웃다 나온 묘한 가게였다.


광장이라 칭하기도 뭐 한 작은 중심가의 벤치에 앉아 남은 치차를 마저 마셨다. 주변 아이들은 강아지와 뛰어놀고 있고 어른들은 나무 그늘 아래서 체스를 두고 있었다. 모든 게 지나치게 평화로워 꿈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요즘도 종종 그 작은 마을을 떠올려보곤 한다. 티 없이 맑기만 하던 사람들. 언제든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는 기억이다.








내일은 어디서 눈을 뜰까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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