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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는 여행 중 Sep 02. 2021

오늘도 아이스크림 하나를 들고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혹시, 여행 얼마나 오랫동안 하는 거예요?’

짧은 근교 여행을 마치고 호스텔이 있는 산힐로 다시 돌아오는 길, 그가 내게 물었다.

‘방해가 안된다면 산힐에서 지내는 동안 같이 다녀도 될까요?’


산힐은 액티비티가 저렴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마을에 도착함과 동시에 이미 패러글라이딩과 레펠링, 래프팅까지 모두 예약을 해 둔 상태였다. 그러한 계획을 말해주자 본인도 액티비티 하고 싶었는데 혼자라서 망설이고 있었다며, 오히려 잘 됐다고 활짝 웃는다. 그래 뭐, 여기 현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같이 있으면 더 편하겠지 싶은 마음에 좋다고, 그러자고 답했다.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건 바로 증명되었다. 간식거리를 사러 들른 동네 과일 가게에서 ‘마라쿠야’를 집어 들며 먹어봤냐고 묻더니 아직이란 나의 대답에 다섯 개씩이나 사서 넌지시 건네주었다.

마트에서 보기는 많이 봐왔으나 생긴 게 낯설어 아직 도전해보지 않았던 과일이었다. 그는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하나를 꺼내 계란 껍질을 까듯 옆 면을 떼어낸 뒤 후루룩 마셨다. 낯선 생김새만큼이나 먹는 방법까지 영 독특한 과일이었다. 그다지 끌리지는 않았지만 사줬으니 하나만 시도해보자며 눈 딱 감고 입에 털어 넣었다.

앗, 맛있다. 여간 맛있는 게 아니라 이후 내 남미 최애 과일이 될 정도로 맛있었다. 살 때만 해도 언제 다 먹냐 싶던 다섯 개는 앉은 자리에서 동이 났다. 역시 현지인이 최고다.


마라쿠야


바로 헤어지긴 아쉬운 마음에 근처 노점상에서 꼬치구이와 캔맥주를 사서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적당히 부른 배와 신선한 저녁 공기, 주변엔 신나게 뛰어노는 귀여운 동네 꼬마들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앞으로 함께 할 며칠간 서로 잘 지내보자며 캔 맥주를 부딪혔다. 짠-.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드디어 오랜 시간 버킷리스트에 방치되어 있던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가는 날이다. 당장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투어였기에 어제 만난 친구는 함께하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두 시간여를 달려 투어 장소인 치카모차 협곡에 도착했다. 아직 가보지도 않은 그랜드 캐니언이 절로 상상되는 장소였다.


본래 정해진 비행시간은 인당 약 2-30분이었으나 잔뜩 신이 나서 끊임없이 꺅꺅대는 나를 태운 비행사는 그에 부응하듯 40분 넘게 하늘 높이 날아주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꿈꿔오던 일을 이루다니, 앞으로도 바라는 모든 것들을 다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투어가 끝난 후 한껏 부푼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 마을. 마을 이름인 ‘산힐’이 주변에 ‘산’과 ‘힐’(hill, 언덕) 밖에 없어서 지어진 이름이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주변엔 특별한 관광지가 없었다. (사실 산힐의 스펠링은 Sangil이다.) 그저 숲과 공원만이 무성할 뿐이었는데 사실 그게 좋았다. 하루 종일 나무 그늘에 앉아 마음껏 여유 부려도 될 합당한 이유가 생긴 기분이었다.

친구와 함어제 캔 맥주를 부딪혔던 공원으로 다시 향했다. 오늘은 햇살이 내려앉은 벤치에 자리 잡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기억에 남을 대단한 얘깃거리는 없었지만 그저 많이 웃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각자의 호스텔로 돌아가며 그는 ‘내일 보자!’고 했다.

내일 보자는 말이 이렇게나 마음이 따듯해지는 말이었다니. 혼자였으면 다분히 심심했을 조용한 산속 마을에서 친구 한 명이 생겨 참 다행이었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날도 역시나 투어를 다녀온 후엔 자연스레 공원 앞으로 모였다. 한껏 긴장해야하는 오전의 액티비티 후 맘껏 게으름 피우며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 완벽한 균형이었다.

우리의 전용석이 되어버린 듯한 분수대 앞 두 번째 벤치에 앉아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 받는다. 노점상 아주머니와도 아이스크림 파는 아저씨와도 매일같이 놀러 오는 동네 꼬마들과도 이제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5일이 지나고 마을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다. 친구와 함께 도착한 정류장에서 각자의 버스를 향해 흩어지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이번엔 '내일 보자'가 아닌 '안녕'이었다. 씁쓸함이 느껴졌다.


묘하게도 버스 안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마을을 바라보며 떠오른 것은 강렬했던 패러글라이딩과 레펠링 투어의 장면이 아닌, 공원에 앉아 산뜻한 바람을 맞으며 보내던 말랑한 시간들이었다.

또 공원에 가냐고 묻던 투어사 직원의 너털웃음,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이 덤으로 하나씩 올려주던 과자, 동양인이 신기한 듯 예쁜 눈을 크게 뜬 채 뚫어져라 쳐다보던 동네 꼬마들, 숲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그 옆에서 매일같이 체스를 하던 아저씨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함께 나눈 친구까지. 다들 그리울 거다.


안녕, 산힐.





내일은 어디서 눈을 뜰까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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