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해 Jul 19. 2017

그 후

우리가 겪는 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뉘고는 한다. 이는 곧 일에 그 전과 그 후가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겪는 감정은 굉장히 순간적인 것이다. 순간 어떠한 감정이 번뜩 떠올랐다가 그걸 까먹기도 하고, 또 다른 새로운 감정이 다시금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다 보니 나중에 이것들을 모아놓고 바라본다면 감정들이 서로 뒤죽박죽 섞여 논리적이지 않고 모순된 모양새를 가지고 있기도 한다. <그 후>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시제는 마구 뒤섞였다. 뒤섞인 시제에서, 이 영화는 한 작가의 감정으로 시작하는 영화이고, 또한 그 감정의 실체에 대해 생각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봉완은 회사 동료인 창숙과 바람을 피웠다. 창숙이 떠나가고 아름이 창숙의 자리로 새로 오게 됐다. 봉완은 아름과 깊은 대화를 나눈다. 사람 잘 뽑았네, 되게 똑똑하네 라며 아름의 깊은 사고를 칭찬한다. 아름은 인생에서 믿음이 되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봉완은 믿음이란 믿을 만한 무언가, 즉 실체가 있어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아름의 의견에 반대하는 생각을 표한다. 봉완의 아내가 메모를 들고 회사로 찾아왔다. 그리고 아름을 불륜녀로 오해해 다짜고짜 뺨을 때린다. 봉완의 아내는 봉완이 예전에 창숙에게 썼던 '메모'를 들고 아름을 창숙으로 확신한 것이다. 봉완은 아름을 위로하다가 돌아온 '창숙'을 만난다. 그리고 오늘 출근한 아름에게 더 이상 나오지 말아줬으면 한다는 말을 한다.


이러한 하룻밤의 해프닝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믿음과 실체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채워나간다. 그리고 그들은 감정을 표현한다. 사랑한다, 예쁘다, 좋다, 이렇게 감정을 표현한다.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면서도, 믿을 만한 실체를 가지고 행동함에도 그들은 실체 없는 믿음인 감정에 휘둘린다. 그저 영화의 말미에 봉완이 한 말_사랑하는 딸 때문에 창숙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딸을 위해서 내 인생을 포기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처럼, 사랑의 감정이란, 그것의 실체란, 사랑하는 딸아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넌지시 질문을 던져보기만 할 뿐이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가 마구 뒤섞인 채로 진행된다. 창숙과 함께 있었던 그 전, 창숙이 떠나고 아름과 함께 있는 그 후. 소화되지 않은 과거와 멈춰있지 않을 현재가 뒤섞여 그 전과 그 후는 동등한 위치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시제를 담은 이야기는 흑백 화면에 아스라이 포장돼 우리에게 모호한 감정을 준다. 또한 영화는 공간에 대한 특징이나 이것을 활용한 장치에는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존의 홍상수 영화에 나왔던 북촌, 연남동, 수원화성, 남한산성 등과 같이 특정 공간을 드러내는 데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로지 이야기에만 집중을 한다. 공간적 특성을 배제하고 과거와 현재를 충돌시켜 시간의 틀을 허무는 <그 후>의 고유한 양식은, 믿음과 실체 그리고 감정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의 객관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마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시간 여행자의 입장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는 그 어느 쪽의 편에도 들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봉완 나름의 실체를 듣고 출판소를 떠나가는 아름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영화는 그저 흘려보내고 지켜보는 듯한 태도를 지닌다. 이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정이다. 그것은 가장 모호하지만 가장 온전하다.


'눈이 정말 아름다워요.'
작가의 이전글 1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