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해 Jan 25. 2019

뼈만 남은 청새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잡아온 것은 청새치였나? 아무튼.


 '저 영화 찍어요.'

 '또.?'


 영화를 또 찍기로 했다. 서울에서. 항상 그렇듯 서울엔 돈도 없고 잘 곳도 없고 가진 건 가끔씩 연락하는 친한 사람 몇 명뿐이기에, 이번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 없이 내 능력 안에서만 간소하게 진행을 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너무 지쳐서 크게는 못 찍을 거 같다. 지치면 쉬어야 하지 왜 또다시 영화를 찍는 고생을 사서 하냐고 묻는다면. 요즘은 분명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무언가를 해야 하고 남겨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시종일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야.) 간소한 마음으로 찍는 작은 영화라 할지라도, 영화를 준비하는 그 기대감마저 작으란 법은 없다. 작은 영화 건, 덜 작은 영화 건 (그래 봐야 아직까지 저에겐 단편이니까요.) 처음 내가 생각한 아름다운 순간과 그림을 담아낼 생각에, 그리고 이것이 영원히 남을 거라는 상상에 설레는 건 마찬가지이다. 그런 설렘과 욕망으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고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기대감이 있는 만큼 아쉬움 또한 있다. 내가 생각했던 배우가 시간이 맞지 않아 함께하지 못할 수 있고, 현장에선 내가 원했던 빛의 느낌이 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원했던 연기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종합적으로 내가 원했던 상황이나 그림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100퍼센트 원했던 대로 나오는 영화란 이 세상엔 없는 것이다. 아직 촬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작업에 임한다. 사실 구석으로 밀어 넣어 모르는 척 먼지 쌓이게 둔다고 하는 게 맞겠다. 준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반복되는 이러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을 받아들이는 게 참 힘들다. 가벼운 마음으로 찍고 싶은 이 작은 영화에서도 말이다.


 내가 원하던 배우가 일정 문제로 참여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소식에, 역시나 안 풀리네 하면서 샤워를 하고 있던 때였다.


 순간 <노인과 바다>가 생각났다. 거대한 청새치를 잡고 육지로 돌아가는 중에, 청새치는 상어에게 뜯겨 점점 더 앙상하게 뼈만 남아 간다. 노인은 그런 상어와 긴긴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 육지로 돌아왔을 때는 뼈만 남은 앙상한 청새치와, 이제는 너무 지쳐버리고 늙어버린 노인의 육체, 그것의 무기력과 허무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때 논술학원에서 읽고 만 책이지만 그때 읽은 내용이 이상하게도 지금 시기에도 적용이 되는 것 같다. 누구나 처음엔 싱싱하고 풍만하게 살이 오른 청새치를 가지고 귀향하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여정을 계속하면 할수록, 청새치는 계속해서 상어에게 뜯기고 앙상히 뼈만 남아 간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남은 것이라도 가져는 수밖에. 영화를 만드는 과정 또한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것들은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의해 점점 변해가고 떨어져 나간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면 이미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라지고 형편없어진 청새치가 너덜이가 된 채로 딸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아등바등 계속해서 항해를 해 나가는 게 스스로가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건 아쉬운 대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 밖엔 없다. 그 남은 청새치라도 지키며 여정을 계속해야 한다. 이 뼛조각이라도 가져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청새치의 존재를 믿지 않을 것이고, 결국 노인에게만 존재했던 것뿐이니까. 어찌 됐건 우리는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려는 사람들이니까, 말미에 남은 것이 뼛조각뿐이라 할 지라도 '어쩔 수 없지..'라며 끝까지 항해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필연적으로, 태어났으니 살아야 한다와 비슷한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이번만은 제발 모든 일이 술술 풀렸으면 좋겠거니 했지만 역시나 보기 좋게 시작부터 삐그덕 거리기 시작한다. 캐스팅 불발로 인해 시작된 불안은 초등학교 때 억지로 잠깐 읽었던 세계 명작을 거쳐서, 그래 원래 인생이 그런 거지라는 애늙은이의 푸념으로 마무리가 됐다. 샤워를 끝내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해봤다. 다시 연락처를 뒤져봐야 하나, 아니면 다른 예상 캐스팅 가안을 짜 보고 그래 이 정도면 괜찮아하고 잊고 빨리 익숙해져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분명히 존재할 테고, 이후엔 그 일을 따라갈 것이다. 하지만 당장 샤워를 마친 지금은, 노곤하니 낮잠이나 한숨 자고 생각하자 하면서 일단은 따뜻한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가 잘못 아는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