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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Hwang Oct 31. 2015

나르시시즘(narcissism)

나르시시즘(narcissism) : 자아도취적 자기애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외모, 능력 등을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믿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자기 중심성을 말한다. 이 단어의 유래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의 이름을 따서 독일의 네케가 만든 용어이다.(출처. 위키피디아) 
 
성경에 보면,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다. 창조주가 가인에게 묻는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되묻는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세기 4:9) 살인자의 대답이다. 책임전가다. 개인주의의 출발이며 자기 중심적 사랑이 최초로 악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악의 생산은 이 나르시시즘을 보호하려고 할 때 이루어진다. 모든 악이 그렇다. 거의 예외가 없다. 자기를 사랑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그 사랑의 중심성이 무엇 이냐가 선과 악을 갈라놓는다
 
자기 중심적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상처받지 않으려고 타인에 대한 배척도 쉽게 한다. 자기 중심적 사랑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 위주로 인맥을 구성한다. 그리고 자기의 연약한 상처를 보호받기 위하여 권력 친화적이다. 나르시시즘이 자기 개인에게 집중되면 이기주의이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까지, 예컨대 가족, 교회, 직장, 특정 단체로 확대되면 집단 이기주의다. 권력은 두 가지 얼굴이 있는데 하나는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인기다. 신체적 폭력은 아니더라도 언어적 폭력이나 감성적 폭력은 공포를 통하여 권력을 생성하고 강화하기도 한다. 모든 지도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불특정 대중으로부터 인기 혹은 구성원으로부터 인기를 얻는 지도자는 권력을 탐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종교 지도자가 그렇고 연예인, 정치인이 그렇다. 그 중심에는 이 '나르시시즘'이 자리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연민을  정당화한다. 연민, 불쌍함은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약자를 정당화하는 합법적합리적 무기다. 남으로부터의 자발적 동정은 약자를 돌보는 아름다움이지만, 그걸 일부러 이용하거나 스스로 연민을 발동한다면 권력의 또 다른 이용법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악하다. 
 
부정부패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가끔 지도자가 아랫사람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기도 한다. 자신이 하는 언행이 바른 것이 아니라면 언제든 직언이나 충언을  아낌없이 해 달라고... 그러나 이런 부탁은 본인의 성찰의무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아주 세련된 자기방어일 뿐이다. 그런 사람은 막상 직언을 들을 때 나르시시즘이 공격당한다고 느낄 확률이 크고 고로 자손심에 타격을 받으면 상대방을 공격하기도 한다. 자기도 그런 자신의 악행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런다. 사람들은 이미 잘 안다. 직언을 하면 관계가 깨지고 틀어질 거란 걸. 이행되지 못할 부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나르시시즘의 이 '자기애(自己愛)'는 지도자들이 후계자를 키우지 못하게 하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대중으로부터  존경받는 카리스마가 강렬한 성직자나 자수성가하여 성공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강한 이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감춰진 이 악행은 가인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되묻는 뻔뻔함과 비슷하다. 좀 세게 말하면 정신의학적인 병리현상이다. 쉽게 말해 나르시시즘은 공주병이다. 왕자병이다. 야박하게 보일지 모르나 배신당한 사람은 위로해 주면 안된다. 그 사람에게 진정 필요한 건 위로 이전 성찰이다. 배신 한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다 죽으면 된다. 그러나  배신당한 자신은 배신의 제공원인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괜히 신앙적 위로나 인간적인 지지로 그 나르시시즘을 미화하지 말아야 한다. 남 욕할 거 하나 없다. 그리고 아파할 필요도 없다. 아픈 감정에 집착할 필요 없이 자기 중심적 도취된 자기애로부터 탈출하면 그만이다. 그 탈출이 다소 힘이 들겠지만, 뉘우침과 반성이 필요하다. 주변의 위로와 신앙적 믿음, 그리고 착한 선행이나 보람으로 나르시시즘을 보호하고 대우해 주지 마라! 결국 그 좋은 것들을 모두 죄악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 2015 Joseph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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