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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터프쿠키 Sep 18. 2016

돈 있는 백수의 가을 근황

오랜만에 노트북을 들고 커피숍에 왔다. 잔인하게 더웠던 여름 내내 커피숍을 다닌 게 지겨워서, 여행을 앞두고 푼돈이라도 아끼려고, 무엇보다도 아픈 강아지를 돌보기 위해 되도록이면 집에 있느라 발길을 끊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강아지 수발에 지치기도 하고, 엄마 아빠도 모두 집에 있으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치매다, 우리 강아지. 치매에 걸릴 만큼 나이 드신 분을 강아지라고 불러도 되나 싶지만. 이상 증세가 시작된 건 8월 말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도 않은데 달력을 보면 어느덧 3주째다. 나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다행히 상태는 호전되고 있다. 놓친 정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젖은 걸레처럼 흐느적거리던 몸에 제법 힘이 붙었다. 치매 증상 중 한 방향으로만 빙글빙글 도는 써클링이라는 행동이 있는데, 깨어있는 시간 동안에는 분홍신이라도 신은 것처럼 써클링을 멈추지 못하고 억지로 잡아서 멈추면 괴로워한다. 계속 움직이느라 살도 많이 빠졌다. 막 증상이 시작됐을 때에는 힘도 없는 몸을 어찌나 힘겨이 움직이는지 정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절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써클링을 하는 모습이나마 그럭저럭 활기차서 한숨이 나오는 정도라고 할까. 


올여름은 일이 바쁘지 않았다. 클라이언트가 대부분 유럽 회사라서 그들이 여름휴가에 나도 덩달아 강제 휴식을 하게 된 거다. 일이 없는 건 프리랜서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지만 올여름만큼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일이 없는 덕분에 마음 편히 강아지를 돌볼 수 있었으니까. 소위 말하는 '돈 있는 백수'로서(많다는 건 아니고 없지 않다 정도...) 돈도 시간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제는 안전하게 써클링을 할 수 있는 놀이방도 만들어줬고 밥과 영양제를 먹이는 것도 어느 정도 체계화돼서 종일 매달려있지 않아도 된다. 


병원에서 말하는 엑스레이니 MRI니 하는 각종 검사와 종양 제거 및 자궁 적출 수술 권고는 모두 무시하기로 했다. 우리 가족의 목표는 강아지가 좀 덜 살아도 좋으니, 살아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몸 편하고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것뿐이다. 우리 강아지가 지구를 위한 대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엄청난 고통을 줘가면서 생명을 연장시키는 건 무의미한 욕심인 것 같아서다. 


이렇게 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벌써 추석이 지났다. 새로 구상한 개인 프로젝트가 있어서, 일과 함께 그 프로젝트에 집중할 생각이다. 강아지야, 나는 돈을 벌 테니 너는 맴을 돌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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