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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둘 Jan 24. 2024

아빠의 두 번째 그녀1

우리 엄마는 내가 11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 후로 살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숫자는 11이 됐다. TV를 볼 때나 차에서 오디오를 들을 때 볼륨이 11에 멈춰있으면 왠지 불안하다. 기어코 10으로 낮추거나 12로 올려야 마음이 편해진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이쪽으로 강박 아닌 강박이 생겼다.(아! 11번 MBC는 좋아한다. 모순인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동갑이었던 아빠의 나이는 마흔한 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젊은 나이셨구나 싶다. 그 나이에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혼자 살아갈 생각에 얼마나 어깨가 무거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의 술 마시는 횟수는 점점 늘었고 집안에서의 한숨소리는 끝이 없었다. 따로 아빠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없는 곳에서 가끔은 눈물을 훔치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었든, 아니면 남겨진 어린 우리 삼 남매에 대한 책임감이었든.

난 아빠가 가여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내가 슬프다는 것보다 내 동생이 가여웠고 아빠가 가여웠다. 아빠가 저렇게 술만 마시다가 병이라도 걸릴까 봐 무서웠다.


다행히 아빠는 내 염려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빨리 괜찮아졌다. 그건 어느 날 낯선 아주머니를 집에 데려왔을 때 아빠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우리 삼 남매를 나란히 앉혀두고 상기된 표정으로  아줌마를 인사시켰다. 난 호기심이 일어서 아줌마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동생은 화장을 진하게 한 아줌마가 무서웠는지 내 팔을 잡았다. 오빠는 기분 나쁜 얼굴로 고개를 까닥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사춘기 소년답게 방문을 쾅하고 닫은 건 지금도 기억한다.


오빠의 기분 나쁨과 상관없이 얼마 후 그 아줌마는 짐을 싸서 우리 집으로 들어왔고 그렇게 우리의 새엄마가 됐다.


새엄마는 뭐든 열정적이었다. 

첫째,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본인만 열심인 게 아니라 우리 삼 남매도 강제로 교회에 보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제일 싫었던 것 중에 하나가 억지로 교회에 가야 했다는 거다. 당시에는 정말 교회에 가기가 죽기만큼 싫었다. 우리 삼 남매가 교회에 가면 사람들은 모두 우릴 보며 말했다.

"에휴, 불쌍한 것들. 쯧쯧쯧."

어른들이 무심코 뱉는 그 말에 우리는 어쩌면 평생 불쌍한 것들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들었다.

난 그런 말들을 듣는 게 너무 싫었다.  그 말들은 너희들은 엄마가 죽었으니 그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너희는 절대 행복하면 안 된다고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나도 안다. 우리 삼 남매가 불쌍하다는 걸. 그렇다고 그런 동정을 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불쌍해서 뭐 어쩌라는 말인가.

내가 성인이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교회를 멀리한 것이다, 교회에 대한 좋은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새엄마가 열정적으로 했던 일은 사치였다.

새엄마는 사치가 심했는데 당시에 우리 집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다락방이라고는 하지만 5학년이던 내가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걸어 다닐 수 있는 제법 큰 또 하나의 방이었다. 평소에 쓰지 않는 가재도구나 짐을 쌓아두고 기껏해야 귤이나 사과상자를 넣어뒀던 방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다락방은 우리가 갈 수 없는 접근 금지 구역이 됐는데 새엄마가 자물쇠로 문을 잠갔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번 새엄마가 문 잠그는 걸 깜빡하고 외출한 적이 있었다. 우리 삼 남매는 이때다 싶어 다락방에 올라갔다가 너무나 달라져버린 그곳의 풍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그릇세트가 박스째 쌓여있었고, 한쪽 벽면을 차지한 행거에는 새엄마의 옷으로 보이는 것들이 빽빽이 걸려 있었다. 처음 보는 수입과자들도 많았는데 우리는 보물섬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주섬주섬 과자들을 주머니에 넣고 그곳을 빠져나왔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화장품 방문판매 아줌마가 집을 방문했고, 냄비 장수들은 와서 직접 요리를 시연해 보였다.

그런 날은 동네 아주머니들로 집이 북적북적했었다.

 

그해 여름방학에 우리 삼 남매는 역시나 강제로 이모집에 보내졌었다. 이모는 우리를 보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울었다. 돌아가신 엄마가 우리만큼이나 그리웠을 테니 이해한다. 하지만 매일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는 이모와의 동거에 우리가 즐거울 리는 없었다.

"그 여편네가 이모집에 가라든?"

이모는 새엄마에게 적대감을 보이며 말했다. '여편네'라는 단어도 난 이모를 통해서 배웠다. 그해 방학 동안 이모는 '여편네'라는 단어를 수백 번은 말했던 것 같다. 

그렇듯 이모네 집에서 우울한 방학을 보낸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집은 많이 변해있었다. 벽지는 물론이고 가구도 모두 새 가구로 바뀌어있었다.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듯 새엄마의 사치는 아주 열정적이었다.


새엄마라면 지금도 학을 떼는 오빠의 이야기로는 우리 집이 새엄마의 사치 때문에 망했다나 뭐라나.

아닌 게 아니라 얼마 후 우리는 큰 집을 팔고 허름하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빠 이야기로는 하던 사업이 사기를 당해서라고 했지만 당시의 어린 나는 오빠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집이 좁아지자 새엄마는  우리 집안 조직을 개편하는 일에 착수했다. 

눈에 가시였던 오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학교 가까운 곳에서 등하교 시간을 아껴 공부하라는 명목하에 집에서 내쫓았다. 당시 우리 집에서 오빠의 학교는 버스로 10분 내외로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새엄마는 학교 바로 옆에 자취방을 얻어주는 남다른 교육열을 보이셨다. 그리하여 17살의 오빠는 유배 아닌 유배를 당해 자취방에서 혼자 생활하기 시작했다.

후에 오빠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오히려 그렇게 혼자 자취를 하면서 숨을 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동생이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새엄마는 지방에 기숙사가 있는 종교학교로 동생을 보내버렸다.

난 우리 삼 남매 중 두 명이 본인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쫓겨났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당시에는 오빠와 동생이 원하는 바가 있어서 큰 뜻을 품고 집을 나갔다고 생각했다. 새엄마가 내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두를 쫓아내고 새엄마가 선택한 건 성격이 제일 무난하고 불만이 없는 나였다.


뭐 그렇다고 새엄마가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최소한 나한테는 잘해줬다. 

알고 보니 새엄마도 재혼이었는데 4살 난 아들을 남편에게 주고 시집을 왔다고 했다. 난 그런 새엄마에게 연민을 느꼈다. 나라도 잘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 삼 남매에게 난 공공의 적이 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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