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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자민 Nov 20. 2022

브런치 대신, 농구

농구가 내 삶에 들어온 그 날

2010년 가을, 나는 베를린의 작은 동네에 있었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해외체류 기회를 덥석 잡아 베를린에 온 나는, 생존 독일어 외에는 문외한인 상태였다. 게다가 한국인, 아니 아시안이 한 명도 없었던 그 곳에서 나의 존재는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만으로도 기존의 결을 깨트리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 되었기에 소통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초반에는 정말이지 마음 둘 친구 한 명이 없었다.


그 중 처음으로 나에게 ‘편안함’ 의 감정을 준 친구가 있었다.

미쉬(Mishc)는 긴 갈색 머리와, 머리색과 닮은 깊고 큰 눈을 갖고 있는 여성이었다. 첫인상부터 청순함이 뿜어져 나왔던 그 친구는, 함께 있으면 왠지모를 언니같은 편안함을 주는 친구였다. (내 눈동자가 갈 곳을 잃어 헤맬 때면 무슨 일인지 먼저 물어봐 주었기에 그렇게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쉬는 시간에 미쉬의 곁에 머물게 되며, 나에겐 인사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친구가 하나 둘 씩 늘어났다. 캐리어의 짐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기숙사 내 방이 정돈되는 시간만큼이 흐르자, 나는 어느덧 ‘여유’ 라는 감정이 동반되는 주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싸이월드가 찾아준 독일에서의 미쉬 (세 번째)



한국에서 주말을 친구들과 보낼 경우, 보통 몇 가지 선택지 안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 맛있는 곳에서 브런치를 먹고,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든지.
- 좀 더 취향이 맞는 친구라면, 가 보고 싶은 전시회에 갔다가 근처에서 맛있는 밥을 먹는다든지.
- 더 편한 친구라면, 쇼핑을 하고 맛으로 승부하는 집에 가서 술 한잔을 기울이곤 한다.


Sex and the city 속의 브런치. 우리의 주말과 다름없다.


나의 친구 미쉬와 나는 새로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꽤나 조심스러운 사이였기에, 전시를 보러 간다든지 술을 마시자는 말을 꺼내기는 조금 어려웠다. 나는 비교적 부담이 덜한 선택지를 골랐다. 그것은 바로 그녀와 함께 브런치를 먹고,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일정이었다. 미쉬의 청순한 눈동자가 이번에도 반짝거리며 ‘너무 좋아’ 라고 대답해 줄 것을 예상하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주말에 뭐해? 같이 브런치 먹을까?”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답변이 찾아왔다.

“미안.. 난 주말엔 안돼.”

“아 그래? 괜찮아. 그럼 다음주는 혹시 어때?”

.

.

.

.

“아 그게..다음 주도 어려울 것 같아.

난 주말마다 축구를 하거든




엥? 뭘 한다고?

벙찐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미쉬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친구가 대신 대화를 이어주었다.

- ‘미쉬는 주말엔 축구하느라 얼굴 보기도 힘들다.’

- ‘미쉬랑 싸우면 (힘이 쎄서) 큰일난다.’  등등


미쉬는 그 말에 친구를 툭 치며 장난스럽게 응수했는데,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긴 갈색 머리에 가려져 있던 다부진 어깨와 탄탄한 바디를 보고 말았다. 나의 청순한, 아니 청순했던 독일여자 미쉬는 사실 바이킹의 피를 이어받은 듯 건강미가 넘치는 몸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미쉬와 나의 약속은 그렇게 성사되지 못했고,

결국 혼자만의 여유있는(?) 주말이 시작되었다.


집에서 소소한 홈메이드 브런치를 먹으며 화병에 꽂아 둔 꽃을 감상하던 나는, 소화도 시킬 겸 한 번도 나서지 않았던 동네 구경을 하러 집을 나섰다. 주거지가 밀집된 베를린의 조용한 외곽 동네를 20분 쯤 걸었을까? 저 멀리에서 웅성웅성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뻥-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하늘 아래 초록잔디 위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내 눈으로 처음 본 여자들의 팀 스포츠였다.


나는 그 곳에서 한동안 발을 뗄 수 없었다. 미쉬가 그 팀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니 운동장이 너무 커서 저기서 뛰는 사람이 미쉬인지 아닌지 헷갈린 채 그 곳을 떠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스무 명 남짓 되어보이는 여자들이, 빨갛고 하얀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을 소리 지르며 달리는 그 모습은 한국에서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생경함과 짜릿함 그 자체였다.


그 때 본 것과 닮아있는 사진 (출처 : unsplash)


초등학교 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월드컵과 올림픽을 보던, 꽤나 스포츠에 진심인 집에서 자란 나였지만, 나는 초등학생 이후로 축구나 농구를 해본 적이 없었다. 5학년 때 까지만 해도 남자 아이들 틈에 껴서 축구를 했는데, 6학년이 되어서는 여자친구들과 손을 잡고 걸으며 운동장을 힐끔 거리기만 했다. 내 쪽으로 공이 굴러오면 수줍은 척 던져 주면서 혼자만의 즐거움을 느낀 것이 다였다. 여중생이 되자 농구나 배구는 체육 시험의 한 종목에 불과해졌고, 누구도 점심시간에 나가 공을 차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에는 운동을 하는 친구가 생겼지만, 그녀는 훈련이 힘들다며 점심시간에도 내내 자던 체대입시생이었다.


나는 그렇게 운동장이 아닌 노래방, 패스트푸드점, 명동과 압구정동에서 스티커 사진을 찍고 수다를 떨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가로수길과 삼청동 거리를 걸었다. 나의 운동 취미는 헬스였고, 당연하게도 나의 주변을 모두 통틀어서 구기종목이나 팀 스포츠를 취미로 하는 여자는 없었다.


푸른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점령한 채 진심으로 땀을 흘리는 그녀들을 보면서, 나는 부러움과 동시에 소외감을 느꼈다. 여자들이 모여 운동장을 뛰는, 나는 어린시절의 추억으로만 남긴 에너지를 그녀들은 잃지 않았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에너지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느낄 모든 기회가 소외된 사회에서 자라왔기에 잊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파란하늘 아래 몇 십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뒤로 미쉬와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 하반기의 베를린과 독일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정말 많은 영감을 주었지만, 누군가 가장 임팩트 있었던 순간을 뽑으라면 난 늘 그날의 축구 구경을 나의 다섯손가락 안에 뽑곤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많은 친구들에게 했지만 다들 ‘오 그래?’ 정도의 반응이었다. 누구 하나 ‘나도 같은 생각이야’ 라며 동조해주지 않았고, 나 역시 ‘우리 같이 운동할래?’ 라는 말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그 땐 그랬다. 여자 농구, 축구 같은 경기는 올림픽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한 키워드였고, 여자들의 스포츠는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 아닌 몸을 가꾸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우리의 건강함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은 또 다시 옅어져갔고,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여느 때 처럼 오랜만에 서래마을에서 친구와 브런치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나와의 브런치 약속에 농구공을 들고 나타났다.

미엔과 내가 만난 운명적인 순간이자,

나의 주말에 브런치 대신 농구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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