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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가찌 Sep 11. 2022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다다르다 서점일기 #71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다다르다 , 대전 은행동 
@다다르다 , 대전 은행동 


1. 지난 월간 다다르다, 라가찌 편에서는 마쓰이에 마사시 작가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책을 읽었어요. 1982년의 일본 도쿄 인근과 나가노 현의 산속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책은 여름의 일상을 세밀하게 표현한 책이에요. 이 책의 원제는 『화산 자락에서 ( 火山のふもとで )』 였다고 하더라고요. 이 제목이 그대로 번역되었다면 저는 읽지 않았을 거예요. 장선정 편집자의 말을 빌리자면, 윤동주 시인의 <사랑스런 추억> 중에서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에서 제목을 결정했다고 해요. 주인공 무라이 슌스케 건축가의 모델인 '요시무라 준조' 건축가는 김수근 건축가의 스승이기도 해요. 


2. 마쓰이에 마사시 작가는 출판사에서 해외문학 편집자로 오래 일하다가 늦게 소설을 썼어요. 지금은 퇴사하고 노년을 위한 문학잡지를 만들고 있어요. 저는 여전히 소설을 한 호흡으로 길게 읽지 못하고 있어요. 툭툭 끊기는 이야기들 속에서 나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번 책은 사회 초년생의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는 일상과 단단한 단정함, 무언가 배우려는 자세로 바라보는 관계 속에서 보다 깊게 빠져들어 함께 여름 별장에 머무르는 기분이었어요. 


3. 우리는 삶의 어딘가에 흘러가고 있는 걸까요. 여름 별장으로 가는 열차 안일까요, 여름 별장의 온갖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 도시로 떠나고픈 마음을 안고 있는 걸까요, 여름 별장을 그리워하는 순간일까요. 무언가가 쉽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요즘 마음으로는 여름 별장에서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겹다며 투덜대는 순간인 건가 싶기도 해요. 


4. 여름의 숲을 통과하며 불어오는 바람은 건축가가 애써 만들어낸, 혹은 세상에 보여주지 않은 건축으로의 여운을 전해줘요. 서점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사람은 무엇을 남기고 있는 걸까요. (서점원 라가찌)


5. "볼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마리코도 비를 알아차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맹렬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뒷마당 쪽 출입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리코는 겨우 웃는 얼굴이 되었다. 유리창을 다 닫았어도 빗소리가 온 방 안 가득 울렸다. 모든 계수나무 잎사귀가 비를 맞고 떨고 있다. 가운뎃 마당에 바로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겼다. 소장실에서 나온 선생님도 남쪽 창으로 밖을 보고 있다. 

비는 한 시간 남짓해서 그쳤다. 유리창을 열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 서쪽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지면서 일몰 직전의 광선을 숲에 던진다. 완전히 황혼에 가라앉아가던 나무들의 잎사귀 가장자리가 오렌지색으로 빛난다. 매미는 이제 암놈 부르기를 단념했는지 지짓 하고 짧게 울고는 계수나무에서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p.151-152) 


6.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릴 때,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데 좋다, 고."  (p.271)


7. "내가 건축가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이 건물은 그 이전의 긴 증개축 역사를 포함하여 선생님과 그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여기까지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 오랫동안 잠든 채였지만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이 여름 별장은 다시 한번 자네가 새롭게 만들면 돼. 탁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 현실에 숨결을 불어넣으면 되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그때의 음성 그대로 내 귀에 되살아난다." (p.416)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비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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