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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Mar 24. 2024

향기

2024. 3. 24.

Brad Mehldau Trio - Little Person


날이 좋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제 택배 주문한 택배가 왔다는 알림이 있었다.


화장실 LED 전등

치약

고무장갑


LED 전등을 갈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커버를 해체하는 방법을 알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비교적 쉬웠다. 날카로운 부분에 손가락이 몇 번 찔려 찔끔 핏방울이 맺히곤 했지만 크게 아프진 않았다. 아주 작은 상처여서 그런 것 같다. 바꿔 설치하려고 하니 강하게 조여진 육각 너트가 문제였다. 친구에게 부탁해 육각 너트를 풀 수 있는 도구가 있는지 물었다. 감사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장비를 가져다주었다.


친구와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는 집에 돌아와 전등 설치를 이어갔다. 나름 손을 보호하려고 새로 산 고무장갑도 끼어봤지만 불편했다. 감전당할 수도 있으니 전력을 차단하고 묘수를 찾아봤다. 기존의 타일을 구멍 내지 않고도 설치할 방법 말이다. 다행히 기존에 있는 브리켓과 새로운 브리켓을 잘 연결하니 문제가 없었다.


모든 걸 완료하고 전기를 켜보니 화장실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났다. 지금 산 곳이 3년쯤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밝았던 화장실은 기억에 없었다. 해체한 기존 전등을 보니 아마도 2016년도에 설치한 것 같았다. 화장실이 환하게 밝혀지자 화장실의 더러운 부분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큰 통에 물을 담고, 락스를 풀어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는 전등만 갈면서 보낸 건 아니다. 오전에 일어나 바로 전등을 갈 생각이었지만 답이 막상 없으니 미뤄둔 원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어찌 보면 마지막의 마지막 원고 수정 작업이라 할 수 있었다. 예제 코드에 들어간 주석 부분을 보기 좋게 표기도 하고, 코드 번호나 그림의 숫자도 순서대로 맞췄다. 마무리 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어 시간 정도하고 나니 딱히 수정할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책도 이제는 끝에 도달했다.


요즘 나는 모든 것을 청소하고 있다. 예전에 입던 옷, 오랫동안 보던 책들을 처분하고 있다. 내 인생에 꼭 필요한 것들만 남기고 하나하나 모두 청소해나가고 있다.


청소하는 기분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더러움이 사라지는 만큼 내 머릿속의 온갖 찌꺼기들도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 보는 책을 15권 정도 처분하니 책장의 한 칸이 비워졌다. 화장실을 청소하니 잘 닦이지 않았던 부분들도 조금 더 하얗게 깨끗해졌다. 집 앞에 공사로 매일매일이 시끄러웠던 빌딩은 마무리가 거의 끝나가는지 건물 안이 아닌 입구 쪽을 공사하고 있었다. 벚꽃은 필 준비를 하는지 초록 몽우리가 가지 끝에 맺혔다.


봄의 향기가 선선히 다가온다.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따스함에 언 마음도 녹는 듯하다. 따뜻해지는 날씨만큼이나 삶에도 향기롭고 평화로운 순간이 오는 것 같다. 평화 속에서 감사하고 있다. 어떠한 미래가 내 앞에 있을지라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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