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나의 여정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상훈 Nov 12. 2024

익숙한 어두움

2024. 11. 12.

Midwayer · Joep Beving


인간에게 빛이 익숙할까 어두움이 익숙할까. 해가 지면 감춰진 모든 칠흑 같은 어두움과 동굴을 밝히는 모닥불이 인간에게는 아주 익숙할 것이다. 그 긴 밤을 지내면서 밤하늘의 별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왜 어제 본 별의 위치가 내일은 조금 달라지는지 궁금증을 가지며 인류는 천문학을 탄생시키고, 과학을 발전시키고, 그렇게 어두움이 없는 사회로 만들어갔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어두움과 적막함. 자극적인 소리는 하나 없는 풀벌레 소리와 불타오르는 모닥불의 소리가 익숙할 것이다. 하루가 마치면 삼삼오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잠에 들고. 따뜻한 불을 바라보며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는 그런 하루였을 것이다. 우리의 조상의 조상이 남겨온 DNA는 낮과 밤에 달랐을 것이다. 밤에는 평온을 찾고, 낮에는 땀 흘려 일하는 일상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익숙함은 어색함이 되었다. 아무 말 없이 불을 바라보는 하루도 풀벌레 소리와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도 익숙하지 않다. 흙에서 나는 냄새도, 흙의 질감도, 더 이상 익숙하지 않다. 아무리 깊은 밤이 되어도 30cm 앞에 끝없이 소리를 지르는 기계가 있고, 환하게 빛을 발하는 식당과 가게, 밤이 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과 컴퓨터. 거기서 들리는 기계적인 키보드 소리. 형광등의 어색한 인공빛이 가득하다. 


무엇이 익숙한 것이고 무엇이 어색한 것일까. 어쩌면 반대가 된 것 같다. 익숙함을 잃어버렸고, 어색함에 맞춰서 살아간다. 닭이 깨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기에 인공음으로 만들어진 알림음이 하루를 깨우고, 감기는 눈을 붙잡기 위해 커피콩을 달인 물을 마시고, 다시 잠에 깊게 잘 수 없어 늦은 밤까지 뒤척인다. 모든 게 완벽하고 평화롭지만 동시에 모든 게 어색하고 이질적이다. 인간의 몸이 바뀌는 것보다 빠르게 세상은 더 빠르게 바뀐다.


완벽하게 푹신한 침대와 완벽하게 아름다운 스마트 기기들. 테두리까지 한 치의 껄끄러움 없이 만들어진 수많은 집기가 기기들. 온갖 지식이 담긴 책과 무료로 무한대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담긴 인터넷. 거의 공짜로 누릴 수 있는 무한대에 가까운 콘텐츠. 마음만 먹으면 과거 어떤 왕들도 먹지 못했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회. 우리에게는 어색하지만 동시에 우리 선조들이 바라던 세계를 만들어냈고, 그것도 아주 저렴하게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냈다. 저렴하게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노동의 가치 역시 저렴해졌지만 상관없다. 익숙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쾌락의 정원이 이미 완성되어 버렸으니.


어떤 면에선 사람들이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현상 유지만 하는 모습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평범하다고, 아니 평범함에도 못 낀다고 할만한 삶을 동경하며 살아왔었다. 사실 이미 충분했다. 과거의 기준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이제는 모든 게 과할 정도가 되어 넘치는 당분을 줄이기 위해 설탕을 빼내고, 넘치는 콘텐츠를 줄이기 위해 디지털 디톡스를 한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미 충분한 유토피아가 도래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훨씬 과거에 유토피아는 임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 유토피아는 도래했으나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세상이 준비해 준 것과는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기에 분명 우리의 후손은 과거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때로는 리세션이 생길지라도 인류는 계속 진보해 왔으니. 우리가 꿈꾸는 것들이 앞으로 100년 후에는 누구나 다 누리는 것이라 더 이상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술은 빠르게 변화하겠지만 인간은 여전히 천천히 변화하고, 느긋한 변화에 맞춰 때로는 원시인 같아 보이는 익숙한 어두움을 찾아보는 게 답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종종 고향에 내려가 늦은 밤 불빛 하나 없는 시골길을 산책하는 걸 즐긴다. 어두운 숲을 옆에 두고, 어떤 들짐승이 나올지 몰라도 길을 걸어보고, 아무 이유 없이 길바닥에 있는 모레의 질감과 흙을 만져보기도 한다. 흙에서 나는 향과 수분. 풀이 내뿜는 공기와 마시는 공기. 


우리는 발전됐다고 말하지만 지구의 대부분은 여전히 원시적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도 끝이 보이지 않은 평원도, 설령 사람 발길이 닿는 곳일지라도 여전히 지구는 과거에 머문 것 같다.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 공허한 공간에서 나는 큰 평화를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평화를 느낀다. 그 어떤 각성제도 자극도 없는 고요함에서 평화를 느낀다. 그것이 내가 인간으로 살고 있고, 인간다움을 느끼는 소중한 순간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 파괴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