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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훈 Nov 15. 2024

상실의 시대

2024. 11. 15.

Yann Tiersen - Porz Goret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학교에서는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중국의 선양시부터 압록강까지 가는 여정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책을 가져와 읽었다. 당연히 이름에서부터 어떤 주제로 이야기되는 책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가지는 친구들도 별로 없었고, 어려운 책을 읽는 건가 싶은 친구도 있었다. 이렇게 확실히 아는 이유는 몇몇의 단짝 친구들은 내가 읽는 책에 대해 관심 있게 물어봤고, 내가 이 책에 대해 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완전히 다른 예상을 하고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상실의 시대'는 책의 이름만 보면 특정한 시대를 다루는 사회 비판적 이야기가 아닐까 싶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다운 상상력과 몰입감이 있고, 또한 상당히 야하다. 나도 이 책이 이 정도로 선정적인 표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표현이 가득한 책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더욱 신선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겉표지만 본다면 이 책이 그렇게 야한 내용이 있는지, 사랑에 대한 내용인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재미를 느끼고, 여러 일본 소설을 읽어보았다. 다만 학교 도서관에는 일본 소설이 많이 없어서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둘러봤는데, 온라인에는 여러 짧은 소설들이 pdf로 돌아다녔다. 그중에서는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신기한 이름의 작가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 작가님과 바나나 작가님의 많은 소설을 그 시절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그때 '상실의 시대'만큼 재밌게 본 또 다른 소설은 '해변의 카프카'였다. 이 책도 하루키 작가님 특유의 세계관과 독특한 일상에서부터 시작하는 몰입감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소설 내용을 기억해 보면 마치 영화로 본 것처럼 영상이 떠오른다. 내가 영화를 본 것인지 소설을 본 것인지 혼동할 만큼 선명한 이미지로 기억이 남아있다. 




'상실의 시대'를 우연찮게 도서관에서 보게 됐을 때 느꼈던, 보물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 선명하다. 낡은 선반에 여러 권의 가득 차있었는데 다른 책들보다 더 많이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었다. 많이 비치됐다는 것은 그만큼 재밌다는 뜻일 텐데 이상하게도 학교 도서관에 이 책을 보는 친구는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던 것 같다. 항상 눈길을 끄는 이 책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세상을 살다 보면 눈앞에 보물이 있어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에게 있어선 '상실의 시대'와 같은 책이 그랬고, 그렇게 발견한 보물은 평생의 추억거리가 된다.


재밌게도 나는 오랫동안 서점을 누비며 살았는데 어느 날 보니 작가로 책을 두 권이나 출판하게 됐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책이 나와버린 것 같다. 마치 부부가 어느 날 아이를 가지고, 낳아서 키우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 보니 책을 쓰고 있고, 책을 완성했고, 그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책을 생각해보곤 한다. 


이것은 필연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책을 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책을 쓰는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러한 모든 사건의 결과로 당연하게 책을 쓰는 사람이 된 걸까. 아니면 그저 나라는 사람의 본성에서 기인한 결과일까.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더 큰 에너지를 품게 된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나에겐 책이 그렇고, 그렇기에 세상에 숨겨진 보물 같은 책들을 보는 순간이 큰 행복이 된다. 어떨 때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저 줄과 줄 사이를 오고 가며 줄어가는 종이의 숫자만큼 더 깊은 몰입으로 또 하나의 세상이 내 안에 창조된다. 보물을 발견한 나와 그 보물을 만들어준 누군가와의 긴밀한 연결.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고, 동시에 그것이 작가에게 주는 큰 보람이리라 생각한다.


나는 종종 사람들이 내 책을 읽어주고,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 줄 때 큰 기쁨을 느낀다. 현재 진행형으로 읽어주는 것도 고맙고, 첫 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나의 이야기를 읽어준 것도 고맙다. 적어도 삶의 그 순간에는 그렇게 작가와 독자 간의 아주 가까운 연결이 생긴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작가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이자 보이지 않은 보물 같은 순간일 것이다.


세상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소중한 순간들이 가득했다. 단순히 돈과 숫자로 평가받을 수 없는 대체 불가한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 작가의 세계에 독자가 발을 딛고, 그 안에서 창조한 세계를 여정한 마법 같은 순간. 그러한 순간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설령 돈이 아닐지라도 작가에게는 행복한 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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