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독서 추적기

메르헨 전집이 내게 준 것...

by 이 환

#김영하 작가님께서 2026년 들어 Instagram 계정에 이따금 올려 주시는 #오늘의문장을 읽어 보다가, 얼마 전 영화를 보며 떠올렸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우선 #오늘의문장 부터 일부를 인용한다.


내 경험으론,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다 보면 긴 의자에 누워 정신분석을 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다년간 마음에 품었던 서사가 느닷없이 불려 나오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심각한 의문점들을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 비비언 고닉, 『끝나지 않은 일』 작가 노트 중에서


그리고 얼마 전 본 영화는 〈마담 푸르스트의 비밀정원〉이다. 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온 프랑스 감독 Sylvain Chomet의 실사 영화다. 코미디라는 점을 내세웠지만, 웃음의 지형보다 마음속 상처를 건드리고 치유하는 지형이 더 뚜렷한 이야기였다.


영화의 내용은 차치하고, 영화를 보면서 ‘프랑스의 예술적 감성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감성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아득한 과거의 언젠가, 분명히 만끽했던 감각 같았다. 상처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그 상처에 함몰되지는 않는 발랄한 태도. 예술적 드러냄과 농담이 상처 곁에서 숨 쉬게 해 주는 기술처럼 느껴졌던 순간들.


그나마 살아오며 익숙해지려 애쓴 이국의 문화가 있다면, 언어를 익히며 조금씩 경험해 온 영미권 문화나 일본·중국·독일 문화 정도일 텐데, 이 프랑스 영화의 빈티지하면서도 화려하며 멜랑꼴리한 감성을 나는 대체 어디서 만끽했던 걸까. 오래전 파리 여행을 한 적은 있지만, 성인이 되어 일주일 남짓 다녀온 경험이 내 감성을 지배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아마도 국민학교 시절 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메르헨 동화 전집’이다. 국민학교 4학년이나 5학년쯤이었을까. 연대를 짚어 본다면 80년대 말, 90년대 초였을 것이다. 지금은 그 책들이 집에 남아 있지 않다. 내게 ‘읽었다’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화 속 마담 푸르스트 여사의 마들렌은 내게도 작동하여 어린 시절 그 동화 전집을 읽던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상처를 입고 함몰되어 살아갈 법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가볍게 뛰어넘어, 오히려 예술적 터치가 돋보이는 삶의 감각으로 대처했다. 이야기와 함께 배치된 메르헨 동화 속 삽화들이 내게 그런 감각을 처음 불어넣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김영하 작가님께서 업로드하신 비비언 고닉의 문장을 이어 인용한다.


이런저런 인물이며 이래저래 전개된 줄거리며 잘못 기억하고 있던 것도 한둘이 아니다.


혹시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것은 사실일까. 위의 문장을 읽으며 ‘정말 그런 책이 있었나?’ 싶은 마음이 들어 찾아보니,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오래전 그 전집을 사고파는 글이 남아 있었다. 학원 출판사라는 곳에서 기획한 책이었나 보다. 적어도 그 책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졌다. 사진을 크게 확대해 보니, 하얀 책등 위 제목의 서체, 양장본 모서리의 낡음 같은 것들이 ‘그 책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넘어 내가 만졌던 세계를 통째로 데려오는 것만 같았다.


사진 속 책들은 꽤 많은 권이 한 세트였는데,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책들은 일부였다. 다른 책들은 생소했던 것으로 보아, 집에 있던 책이 전집 전체가 아니라 몇 권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어디서 누군가 버린 책을 잘도 주워다가 내게 가져다주시곤 했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말하는 작은 개〉, 〈숙제하러 온 우주선〉, 〈할아버지가 좋아요〉, 〈하늘을 나는 버찌 아주머니〉…


그런데 ‘세계 문학 전집’이라면 꼭 어느 한 나라의 작품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메르헨’이라는 단어 때문일까, 그 이야기들은 왜 막연히 프랑스나 영국 같은 유럽 어딘가의 이야기였을 거라고 기억되었을까. 가보지 않은 유럽이라는 공간에 대한 동경 , 그 막연한 감각의 밑바탕은 어쩌면 그 시절 내가 읽었던 이야기들에서 비롯된 것일까. 지금은 그 시절보다 더 배운 것이 있어, 서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경계하는 마음도 전두엽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다만 영화와 문장이 불러낸 감각은, 그 경계심보다 먼저 도착해 버렸나 보다.


아직도 봄에 벚꽃이 피면, 나무 주변을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를 떠올린다. 근거 있는 상상이라며 꽃이 필 때마다 어린 시절 〈하늘을 나는 버찌 아주머니〉라는 책의 표지 그림을 하얗게 만개한 벚나무와 콜라주처럼 맞붙여 놓곤 했다.

집에 사는 동물들이 인간이 잠들거나 집을 비우고 없을 때 몰래 자기들끼리 말하는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더 자주 한다. 특히 김훈 작가의 〈개〉나 김애란 작가의 〈노찬성과 에반〉 같은 이야기를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어린 시절 〈말하는 작은 개〉를 읽은 경험의 연장선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년기의 나는 이따금 읽는 일이 좋았을 뿐, 지금처럼 읽기에 일종의 강박을 갖지는 않았다. 지금은 읽기가 일부 직업과 연관성을 가지면서, 반은 좋아서 즐기고 반은 살기 위해 애써 공부하는 일이 되었다. 소위 말하는 몰입의 경지는 어쩌면 전혀 강박이 없었던 어린 시절 더 자주 맛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읽어 버린 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비밀의 화원〉, 〈로미오와 줄리엣〉이 떠오른다.


지금 보니, 이 이야기들의 여주인공들은 부모가 없거나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어쩌면 나는 순종보다 이탈에 마음이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혼자 세상을 건너야만 이야기의 문이 열리는 세계. 그 문을 나는 문고판 소설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딸이 독서하는 사람으로 크기를 바랐던 아빠는 이따금 강압적으로 책 읽기 과제를 내주시기도 했다. 그때 읽으라고 하신 책에는 〈왕자와 거지〉, 〈장발장〉이 있었다. 곶감색 표지의 계몽사 세계문학전집 일부였다. 지금 돌아보니 내가 좋아했던 책의 주인공은 대체로 여자아이였고, 아빠가 읽으라고 한 책의 주인공은 남자아이였던가 싶기도 하다.


은근 반골 기질이 있는 나는, 그 ‘읽으라’는 책들을 그때는 읽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강제로 읽으라는 맥락에서 벗어난 다음에야 비로소 읽었다고 한다.
(이건 딴 얘기지만, 그래서 아빠는 내가 반골 중의 반골이 될까 봐 사회학과에 가는 것을 그렇게 반대하셨을지도 모른다. 아빠 생각에 사회학과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난 그 기질을 간직한 채 보수적인 조직 속에서 일하며 인격을 하나로 통합하느라 평생 내적 갈등하며 살고 있는 줄은 모르시겠지.)


어릴 때 주변에 읽을거리가 풍부하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주어진 마들렌이 두 개뿐이라서였는지, 국민학교 고학년 시절의 읽기에 관한 기억은 메르헨 동화 전집과 계몽사 세계문학전집에서 그치고 말았다.

정말 그게 다였을까. ‘내 유년의 독서 추적기’라는 제목을 질러 놓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그다지 없는데도 ‘어릴 적 나는 읽고 있었다’는 감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 생각을 이어가는 것을 도우려는 것일까. (이렇게 사람이 자의적이다.) 어제 남편이 분리수거를 하면서 아이들 책을 한 묶음 내다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들이 더 이상 읽지 않으면 내다 팔거나 읽을 만한 아이를 찾아서 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쓰레기인 줄 알고 힘껏 내놨다고 한다. 화가 났다. 내가 책에 대해 가지는 마음을 2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이토록 모른단 말인가.


우리 엄마와 아빠는 내가 읽던 그 책들을 다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 보니 아빠가 사다 주신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이 손자병법〉, 〈삼국지〉도 책장에 있었다. 내 독서가 은근 남성 취향의 면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건 아빠의 영향인가 한다.

피아노 학원에 갈 때마다 빈 피아노 방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보물섬〉, 〈윙크〉 같은 월간 만화책을 읽었던 것도 중요한 독서 경험일 것이다.

국민학교 고학년 시절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집으로 배달 오는 〈소년D일보〉를 읽으며, 이따금 ‘나의 주장’ 같은 코너에 투고를 하기도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가서 읽었던 계몽사 위인전(우리 집과 달리 매끈한 새 전집이 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리고 그 책들 중에 헬렌 켈러, 슈바이처, 유일한 박사의 이야기를 꽤 좋아해 마음에 오래 간직했다)을 읽었던 일.

같은 반 한 남학생과 하굣길에 걸어오며 역사 지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 발제 자료 역할을 했던 <먼 나라 이웃나라〉(지금 생각하니 그건 나름 독서 토론이었다. 그 남학생은 어디선가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계실 터다. 그리고 당시엔 그 책을 쓰신 분의 역사관 같은 것은 생각하지 못할 나이였다.)


여기까지 내가 유년기에 대체 무엇을 읽었는지에 대해 나열하는 식의 글이 되었지만, 지금 나의 정신세계가 이때의 이야기들과 무관하진 않다는 일말의 확신이 생겼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읽은 덕분에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실천했을지도 모를 일이오, ‘헬렌 켈러’ 덕분에 그녀를 있게 한 ‘설리번 선생님’의 일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읽기는 조각조각이었지만, 한편 제각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재와 결핍을 견디는 법, 세상을 향해 용기 내는 법, 비밀을 간직하는 법, 꿈을 키우는 법을 그 이야기 덕분에 무의식적으로 익혔으며, 지금도 그 사이에서 어찌어찌 균형을 잡고 사는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독서에 대한 메타 지식도 책도 넘쳐나지 않던 시절(지금은 너무 넘쳐나서 다소 힘들다), 주변에서 그저 주어진 어떤 조각을 이어 붙이듯 채워 간 나의 유년기 독서가 내 삶의 은근한 양분이 되었다니(‘독’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소중하기도 하다.


월,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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