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여행의 이유'를 깨닫던 날

- 김영하, 『여행의 이유』를 들고 떠난 여행

by 겨울아이 환

* 노션에 가끔씩 썼던 글을 갈무리하다가, 이 글을 발견했다. 이 여행이 벌써 1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그때의 내 마음이 사뭇 낯설다. 어쩌면 난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내가 쓴 글을 낯선 것으로 여기면서 감각한다. 그 때 그 모습이 진짜 나였을까? 그 연속성을 떠올릴 수 없는 내가 되어 버리기 전에, 지나간 시간을 붙잡는 심정으로 소소한 여행기 한 조각을 정리해 둔다. *


다시 짐을 꾸린다. 캐리어 세 개에 네 식구가 일주일간 쓸 물건을 요리조리 넣는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도 챙긴다. 이번 여행에 가지고 갈 세 권의 책 중 한 권이다. 첫 장엔 “다시 짐을 꾸리는 마음으로”라는 문구와 함께 작가의 서명이 있다.


가까운 국내 여행은 몇 번 다녀왔지만, 온 가족이 ‘지금 여기’(p.16)가 아닌 먼 곳으로 떠나는 건 팬데믹 이후 처음이다. 딸은 내년에 고등학생이 되고, 4년 전 캐리어를 겨우 끌던 둘째는 어느새 초등 고학년이 되었다. 떠날 수 없던 시간은 길었고, 떠날까 말까 주저하던 시간은 더 길었다. 그 사이 많은 것이 바뀌었다.


4년 전엔 아이들이 어려 여행의 주도권이 우리 부부에게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여러 번 의견을 물어야 했다. 방도 이제 두 개를 잡아야 했다. 그 단순한 사실이 낯설고, 조금은 서운했다. 이 여행이 과연 극기훈련이 아닌, 싸우는 여행이 아닌, ‘지금 여기가 아닌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될 수 있을까.


애초에 여행에 대한 동력이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갈 곳을 고르는 일도, 비행기와 숙소를 정하는 일도 예전처럼 흥미롭지 않았다. 결제를 앞두고 있을 때마다 머릿속을 채운 단어는 ‘가성비’였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커진 건 캐리어 무게뿐 아니라 여행 경비도 마찬가지였다.


비행기는 가뿐하게 이륙했다. 독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남편에게 『여행의 이유』를 건넸다. 하늘의 기운 때문일까, 그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최애 작가의 책이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권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그런데 그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보니, 묘하게 전도에 성공한 기분이었다.


싱가포르행 밤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쯤 지났을 때, 기체가 살짝 흔들렸다. 아이고, 비행기가 난기류를 타는구나. 그 순간, 하나의 직감이 스쳤다. 이 여행,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위태로울 수 있겠구나.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이 조건에서 ‘지금 여기가 아닌 곳’으로 훌쩍 다녀오는 것, 지난 4년 동안 내게 있었던 변화를 스스로 확인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번 여행의 끝에서 내가 발견할 ‘여행의 이유’가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길가메시처럼, 오디세우스처럼 — 나도 깨달음을 얻게 될까. (p.39)


출발 전부터 설렘이 부족했던 여행은 역시나 문제를 드러냈다. 들고 온 가이드북 빼고는 ‘지금 여기’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다. 복잡하게 굴지 말자. 오직 ‘지금, 여기’에만 집중하자.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 방법만 궁리해. 그랩을 이용하면 된다고 해. 그 앱을 깔아 봐.” 남편에게 말했다.


자정이 넘은 타국의 공항에서 무사히 택시를 타고, 숙소의 하얀 침대 위에 긴장을 풀고 누웠을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여기부터 새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