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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싫어

지구별 탐사일지 5화

by Stardust

오렌지 향이 날리는 절경 해안도로를 오토바이로 달렸다는

친구의 친구 여행담이 우리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 환상여행을 꿈꾸며, 남부에 4일을 머물기로 했다.


숙소는 소렌토.

나폴리는 기차역에 짐을 맡기고 가볍게 둘러보기로 했다.

유명한 피자를 먹고, 대성당을 지나 시장을 훑고,

바닷가 누오보 성에서 사진과 식사까지.

첫날부터 숨가쁜 일정이었다.


하지만 나폴리 시장에 도착할 무렵,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마라도나 얼굴이 온사방에 나부끼고,
재미난 풍경과 색색의 가게들이 끝없이 이어졌지만,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시장통에서 목이 타 급히 사 마신 오렌지색 아이스 음료는…
스프리츠였다.
더위에, 거기에 알코올까지. 나는 그대로 취해버렸다.


“어? 야, 어떻게 술을 버려. 차라리 나한테 버리지.”
친구의 핀잔에 머쓱하면서도,
설마 내가 이렇게 약할 줄은.
한여름에 태어난 내가 태양에 이렇게 무너지다니.


다행히, 성당에선 샐쭉하던 J가 쇼핑에 눈을 반짝였다.
첫눈에 반한 대리석 십자가를 놓고 주인장과 흥정하더니, 결국 좋은 가격에 샀다.


Y는 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레몬 문양의 에스프레소 잔 세트를 골랐다.

“소주잔으로 써야지.”

역시 Y. 득템한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나폴리 장인이 만든 우산을 샀다.

나무로 만든 손잡이의 곡선과 꼼꼼한 바느질이 마음에 들었다.


어디선가 현악 선율이 들려왔다.

파사드에서 풀이 자라고 있는 성당이 자리잡은 광장 한 켠,

책을 파는 오래된 서점이 있었다.

단테와 데카르트 서점.

나는 나폴리 작가가 돌로미티를 배경으로 쓴 소설을 골랐다.

J는 중고 그림책을 여러권 샀다. 그림을 좋아하는 구나.


맘에 드는 물건들을 손에 든 우리는 기운이 났다.


밤 기차로 내려

큰 여행가방을 끌고 컴컴한 골목길을 걷는데,

레몬 향이 바람을 타고 스쳤다.

소렌토가 먼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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