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일을 계속 해나갈 상태가 아니란 걸 드디어 인정했고, 결국 일을 접기로 결정. 물론 완전히 때려칠 수는 없고, 최소한의 할 일만 남긴 채 웬만한 건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번주 내내 사람들을 만나서 일일이 상황을 설명하고 다니는 중. 대충 꼽아보니 다음달 중순까지는 이러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와.. 이 코딱지만 한 사업에 걸려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니, 새삼 놀랍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날벼락일 거다. 나름의 계획들이 있었을 텐데 갑자기 이 여자가 뭐하는 건가 싶었겠지. 암만 봐도 멀쩡해 보이는데 알맹이가 그 모양이라니 차마 대놓고는 뭐라고 못하고, 속으로는 상소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입으로는 걱정해주니 고맙지 뭐.
그런데 솔직히, 이것 자체도 좀 버겁다. 하루에 딱 한 명씩만, 그것도 고작 며칠 만났을 뿐인데 에너지가 쭉쭉 빨리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이것도 최선을 다한 거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던 내가 이 모양이 되다니. 망할 놈의 우울증.
에너지가 빨려나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평소의 우울한 나는 그럭저럭 대충 넘겨왔다. 그러니까, 오고가는 점잖은 대화 속에서 소리없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밥그릇 싸움 말이다. 코딱지만 한 사업이래도 이해관계가 있는 법이라, 갑작스런 변수에도 최대한 자기 이익을 지키려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치열함도 의욕이 있어야 나오는 거지, 만사가 귀찮은 우울증 환자는 뻔히 알면서도 차라리 호구가 되는 게 더 편하다. 돈? 됐어, 알았으니까 가져가. 대신 연락 좀 하지 마. 이런 식으로 2년을 지냈으니 매출이 이 모양이지. 솔직히 안 망한 게 기특하다.
그래도 사람이 책임감이라는 게 있잖아. 나 혼자면 망해도 그만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내 역할을 떠넘기려는 마당에 대충 던져놓고 도망칠 수는 없지. 우울한 호구로서 모른 척 해왔던 문제들을 몽땅 정리할 때가 됐다. 이거 쳐내고, 저거 쳐내고, 깔끔하게 만들어서 넘겨줘야 한다. 그러려고 없는 에너지를 짜내서 이렇게 이해관계자들을 만나러 다니는 거라고, 내가.
이것은 매우 섬세한 작업이다. 회사가 작다 보니 대부분의 갑을관계가 애매해서, 과감하게 쳐내기도 그렇고 계속 우쭈쭈 해주기도 그런 관계들이 많거든. 다리털 왁싱페이퍼 뜯어내듯이 한 번에 과감히 쳐내야 할 때도 있지만, 한정판 아이돌굿즈 포장지 벗기듯이 조심조심 뜯어내야 할 때도 있다.
가장 골치 아픈 건 상대방이 왁싱페이퍼인지 굿즈 포장지인지 잘 모르겠을 때다. 그럴 땐 두 가지 시나리오를 모두 생각해두고, 만나서 탐색전부터 해야 한다. 결심이 선 후에도 뜯어낼 타이밍을 재야 하고. 이래저래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인데, 문제는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도 쉽지 않다는 것. 그럼에도 하긴 해야 하잖아.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도 없는 일이니까. 괜찮아, 아침에 약 먹었잖아. 버텨봐.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힘들어서 정리하는 건데, 오히려 정리하느라 힘이 더 드는 이 느낌은 대체 뭐지. 뭐, 그래도 기분은 좀 괜찮지 않아? 가장 골치 아픈 문제들은 어느 정도 결정되었으니, 이제 정해진 수순대로 마무리만 잘 하면, 그렇게 원했던 은둔생활에 들어갈 수 있는 거잖아. 인생이란 그런 거야. 원하는 걸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해. 공짜는 없어. 우울증 환자라고 예외는 아니야. 그러니까 견뎌봐. 여기, 약 한 알 더 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