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혼의 도끼질 Nov 08. 2022

4일만에 침대 밖으로 나온 날

사무실을 정리하고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다. 지난 4일은 그야말로 꿈 같은 시간이었지. 아, 너무 좋아서 꿈같았다는 게 아니라, 내리 4일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꿈만 꾸다 보니 뭐가 생시인지 잘 분간이 안 되었다는 뜻이다.


사무실 업무를 정리하는 건 자질구레한 일을 모두 넘기고 본업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원래부터 이렇게 일을 안 하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정확히 뭐가 힘든지, 왜 힘든지를 알 수 없으니 당분간은 의식의 흐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폐인처럼 지내겠다는 게 내 계획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폐인처럼, 끼니는 배달을 시키거나 건너뛰고, 빨래와 설거지는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음악 듣다가 잠들다가 깨다가..


그렇게 5일째, 드디어 오늘 아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마만이더라, 이렇게 가뿐하게 일어난 게. 라디오를 켰더니 흘러나오는 음악도 괜찮고, 창밖을 보니 날씨도 좋다. 간만에 밀린 빨래를 돌리고, 쌓인 설거지를 하고, 현관 앞에 며칠째 방치해뒀던 사무실 짐도 풀어서 정리했다. 오~ 이것이 바로 잉여력인가. 생산성이 샘솟는 기분이군. 아주 좋아.


이 여세를 몰아서 떡진 머리를 박박 감아 말리고, 노트북을 챙겨 근처 카페를 찾았다. 이 기분이라면 밀린 업무도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다. 좋아, 딱 세 시간만 집중해볼까. 커피 한 잔을 놓고, 메모지에 오늘 해야 할 일 목록을 적어본다. 어디 보자, 지금 밀려있는 원고는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이거는 지금 상태가 어떻더라.. 음.. 역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네. 아직은 집중력이 부족하군. 음... 음... 으흠???


순간 심장이 한 번 쿵 내려앉더니, 도곤도곤도곤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가슴이 뭔가에 짓눌린 듯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한 번에 후우욱 하고 뱉어낸다. 반쯤 남은 커피잔을 들여다보았다. 커피 때문인가. 하긴 오늘 커피가 좀 진하게 느껴지긴 했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호흡은 여전히 답답하고, 심장박동 때문에 신경이 조금씩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메모장에 좀 전에 써놓은 글자들이 그렇게 뾰족하고 못생겨 보일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후우욱 내쉬고, 결국은 펜을 내려놓았다.


당분간은 커피 대신 차를 마셔야겠어. 물론 커피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린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약을 먹으니까 다를 수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사실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이미 단어 하나가 떠돌고 있었다. 설마 이거 공황 증상 아니야? 예전에 한 번 겪어봤던 그거 같은데.. 에이, 아니다, 그냥 카페인 때문이지 무슨.. 근데 진짜 그런 거면 어쩌지.. 에이, 무슨, 아니겠지. 괜히 넘겨짚지 말자.


그렇게 쓸데없이 차도녀인 척 폼잡고 카페까지 갔다가 일은 시작도 못하고 왔다. 5,100원씩이나 주고 시킨 커피는 결국 반이나 남았지만, 그대로 일어서기는 돈이 아까우니까 괜히 유튜브 틀어놓고 낄낄대며 시간을 때우다가 나왔다. 약간의 현타. 원래 카페에서 유튜브 보는 사람들을 제일 이해 못하던 사람이 나였거든. 물론 편견이지. 하지만 왠지 날백수가 된 것 같은 이 느낌, 썩 좋지만은 않네.


아직은 일을 하기보다는 좀 더 폐인으로 지내야 할 시기인가보다. 현타는 좀 오지만 그래도 너무 자책하지는 말자. 오전에는 나름 많은 발전이 있었잖아. 고전SF영화에서 동굴을 기어나와 뼈다귀를 들어올리던 위대한 침팬지처럼, 나도 침대에서 기어나와 많은 일을 해냈다고. 봐, 오랜만에 이렇게 글도 쓰고 말이야. 그만큼 희망이 있는 거지. 내일은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그러니까, 오늘은 일단 좀 더 누워있도록 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