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으로 읽는 단편영화
<유타나시아>
'너도 자식새끼 낳아 길러봐라.
엄마 말 이해할 거다.'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
거짓말 조금 보태
100만 번 들었을 말.
엄마의 잔소리.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그나마 아주 조금.
대본리딩
이 영화는
누구나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유타나시아.
euthanasia
그리스어인 이 말의 뜻은
아름다운 죽음
곧,
'안락사'를 의미한다.
이 영화에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안락사를 집도하는 의사와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이야기가
주요한 줄거리다.
여기에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한
치매를 앓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가
또 다른 한 축.
이 영화의 시대배경은,
안락사가 합법화된 가까운 미래의 대한민국.
아내를, 자식을, 스스로를
존엄하게 살게 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치매, 죽음, 부양, 존엄한 삶,
이 모든 걸 담아낸 유타나시아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다.
내가 맡은 역은
아들과 딸 몰래 안락사를 준비하는
초기 치매환자였다.
S#11. 주원의 집, 주방
주원과 함께 저녁을 먹는 주원모,
집 안에는 주원모의 치매 흔적들이 보인다.
주원모
얼마 만에 아들이랑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건지,
넌 뭐가 그렇게 매일 바쁘니?
주원
회사 일 말고도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있어서 그래, 이제 매일 같이 저녁 먹자.
밥술을 뜨는 주원을 지그시 바라보는 주원모
주원모
너 일 보는 거 있으면 일 봐.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너나 선영이한테
엄마 짐 되는 건 싫다.
주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엄마가 왜 짐이야.
이상한 소리 하고 있어 진짜.
주원모
너도 자식새끼 낳아서 길러봐라.
엄마 말 이해할 거다.
숟가락을 내려놓는 주원.
주원모
성질머리 하고는, 밥 먹어 얼른.
찌개 식는다.
함께 밥을 먹는 주원과 주원모.
'밥 먹어 얼른, 찌게 식는다'
씬 11, 이 장면은
정작 아들은 모르지만
아들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자 했던
엄마의 만찬씬.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안락사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다.
그저 에둘러 이렇게 말할 뿐.
"밥 먹어, 얼른"
유타나시아를 찍으면서
유독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매번 전화해서는
왜 그렇게 밥 먹었냐는 말을
많이 하셨는지.
매번 끼니때마다.
밥 먹으라는 이 말을 달고 사셨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너 지금 괜찮지?라는 마음이라는 걸.
제대 끼니를 챙겨 먹는다는 거야말로
그날 하루가 괜찮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엄마의 그 말, 그 마음을 생각하니
주원엄마를 준비하는 마음이 짠했다.
주원역을 맡은 한동주배우님과 현장 리허설
'밥 먹어 얼른'
아들을 위한 마지막 저녁식사라면,
뭘 해주고 싶으세요. 마레 배우님!
찌개거리를 사러 스텝들이 달려갈 때도
연신 질문을 주셨던 감독님,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굳이 연기하려 애쓰지 않아도 돼요.
그냥 그대로의 엄마를 보여주면 됩니다.'
아직도 채울 게 많은 나에게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요즘도 '엄마'라고 불러주시며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시는
큰아들 같은 감독님
이 현장은 그래서 더더욱
가족 같았다.
짧고 길고 굵고 가는
배우님들 각자의 연기인생들이
엮어낸 색색의 매듭.
촬영한 지 2년.
그리운 이름들, 그리운 얼굴들, 팀유타나시아.
오랜만에 꺼내 본 서랍 속 앨범 같다.
배우와 스텝들만 모인, 상영회에서 팀유타나시아
유타나시아
Fiction/Color/ 21'
각본/연출: 주시현
출연: 김도하, 한동주, 임한나, 장마레, 신명은, 강채린, 차종호, 홍지수
삶에 대한 섬세한 고찰,
세대 간 갖가지 스토리로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할
주시현 감독의
영화로운 시절을 응원합니다.
배우가 찍고 쓰는 단편영화이야기
'100명의 마레가 산다'
장마레의 브런치북은 수요일 밤 0시.
이번 주만, 개인적인 일정으로
반나절 당겨 화요일에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