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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보지기 Aug 05. 2018

아집(我執):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

아집일까? 원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일까?

며칠 전 한 인터넷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프라이머 데모데이에서 마보 발표(우리가 만드는 마음챙김 명상앱이 한국 최고의 액셀러레이션 프로그램 프라이머 13기로 선정되었었다.)를 보고 연락을 주셨다 했다. 작은 스타트업에게는 이런 관심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인터뷰 당일, 연락을 주셨던 기자님을 우리가 입주한 건물 빌딩 1층에서 만났다. 


그런데 기자님이 조금 뒤에 촬영기자님이 오신다고 알려 주셨을때 비로소 나는 내가 촬영에는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무방비상태라 함은... 촬영에 적절한 '옷', '헤어스타일', '메이크업'을 갖추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몇번 이런 인터뷰나 강의 촬영을 통해 스스로 '무방비상태'와 '방비상태'의 격차가 크다는 것을 깊이 통감하고 무척 겸손해졌음으로(예전에는 '명상 선생님인데 너무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일까봐...'하는 생각에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했으나... 최근에 깨달은 것은 오히려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고 나오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 몸과 마음은 조금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준비된 상태'로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며 촬영을 위해 기자님들이 세팅을 하실 동안 사무실에 우리 팀원이 놓고간 자켓을 걸쳐 보고(소영님,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소영님 그 자켓 맞아요.) 화장실로 달려가 화장을 고치고 오랫만에 마스카라도 곱게 발랐다. 그리고 달려나와 인터뷰를 하시는 기자님 앞에 앉았다.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 인터뷰 자리를 찾기 위해, 자리를 세팅하기 위해 셋이서 건물 전체를 이리저리 떠돌았던 것에 비하면 인터뷰 자체는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 있었다. 물론... 인터뷰를 하는 도중 촬영기자님은 열심히 촬영을 하셨음은 물론이다.


인터뷰를 마치신 기자님은 기사가 내일 당장, 즉 인터뷰 하루 뒤에 나온다고 알려 주셨다. 그리고 거의 정확히 하루 뒤, 전 날 인터뷰를 마친 퇴근시간 무렵에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고 기자님이 카톡으로  "한번 봐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친절히 링크를 보내 주셨다. 그런데 그 링크에 딸려온 썸네일 사진을 본 순간....ㅠ.ㅠ 


<자료사진: 마보앱>기분별 마음보기> 실망했을때>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사진은 내가 그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굉장히 심각하고 화가 난 듯한 여자가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순간적 판단을 접고 곧바로 그 기사를 열었을때 나는 기자님이 나에게 기사를 확인하라고 해 주신 것에 정말 감사했다. 내 나이를 5살 많게 적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인터뷰 후 전화로 나이를 물으셨는데 잘못 들어서 일어난 일이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다행인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나이가 잘못 나왔다고 말씀드리자 마자 나이가 아예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언제부터인가 나이가 잘 맞지 않는 거추장스런 겉옷처럼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다. 쿨럭)


그런데... 스크롤을 내리자 두장의 사진이 더 있었다. 그리고 그 두장의 사진은 정말...ㅠ.ㅠ 아... 지.못.미. 라는 말은 이런 때를 위한 말인가?! 화장이나 옷의 문제, 혹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얼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단어를 말하기 위해 입을 쭉 내밀고 있는 모습,  이상한 손 동작, 그리고 잔뜩 치켜 세워진 양미간까지...... 나에게는 너무나 낯선 나의 모습에 일단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자로서의 자아가 발동했다. 나는 다급하게 기자님에게 사진을 좀 바꿔 주실 수 있냐고 카톡을 통해 묻고 있었다. 이미 명상 선생님으로 내가 세운 어떤 이미지, 즉 '다른 사람의 평가나 판단, 특히 외모에 대한 판단에 초연한' 은 사라지고,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정녕 이게 최선인가 하는 약간의 분노까지 들었을 정도이다.(촬영기자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수행이 부족한지 순간 그렇게 생긴 제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솔직히 말해 그냥... '혹시나 바꿔 주실 수 있다면 좋겠다.'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부탁드린 것이었다. 기자님은 정중하게, 그리고 조금은 단호함이 느껴지는 말투로 나이를 바꾸는 것은 팩트이기 때문에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이미 발행된 기사이기 때문에 어려울 수 있다고 알려 주셨다. 그런데 기사를 한줄 한줄 꼼꼼히 읽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건 바로 내가 한 말이라고 ""까지 달면서 인용하신 말때문이었다.


명상에 대한 장벽을 낮추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마보가 추구하는 명상은 붓다처럼 특별한 정신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에요. 밖으로 향했던 관심을 잠시나마 안으로 돌리는 거죠. 일상 속에서 스친 생각과 감정을 관찰하다 보면 지혜를 얻을 수 있어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언제 슬프고 화나는지 등 자신에 대한 빅데이터를 얻는 작업인 셈이죠.


직접 그 기사를 읽어보시고 싶다면: http://www.bizhankook.com/bk/article/15977 


자, 나는 이런 말을 하긴 했었다. 물론 딱 이런 문장이 아니긴 해도 말이다. 그리고 이 문장 자체는 정말 기자님이 너무나 잘 정리해 주신 말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잘못 들어가 있는 네 단어...'붓다처럼'을 빼고....


"명상은 붓다처럼 특별한 정신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에요." 라니......


명상은 바로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한 수행, 그 자체인데!!!!!!!!!!!!!


그때부터 나는 기자님에게 카톡을 보내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기자님, '붓다처럼' 이란 말이라도 빼주시면 안될까요?" 카톡에 답신이 없자 집요하게 전화를 걸었다. 퇴근 후의 시간이라 그런지 전화는 받지 않으셨다. 다시 카톡을 보냈다. 데스크가 다 퇴근을 하셔서 내일 출근하면 반영해보도록 노력해 보시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조금 안심이 되면서 너무나 내가 집요하게 군 게 아닌가 그때써야 문득 기자님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 문장만 빼고는 정말 최선을 다해 잘 전달하려 노력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인데 말이다.

마보앱>상황별 마음보기> 아침에 눈을 떠서

다음 날이 되었다. 오전에 출근해서 확인을 했는데... 여전히 거기에는 여러분들이 보시는 대로 '붓다처럼'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 아마 그 기사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기자님의 노력이 통하지 않았나 보다. 아마 데스크에서 내 나이를 잘못 기입한 것은 팩트 오류가 맞지만 명상의 목적을 붓다처럼 되는게 아니라고 말했다라고 하는 것은 팩트체크의 영역이 아니거나 내 나이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사실... 내 나이야 말로 계속 변하는 것인데... 언젠가는 지금보다 5살이 더 많아질텐데...... 하지만 명상의 목적이 우리가 모두 '붓다처럼' 되는 것이 더 변하지 않는 진리일 텐데......


전체 기사를 열심히 써주신 기자님께 정말 너무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그 네 글자, '붓다처럼' 이라는 말 때문에 그 기사를 SNS 에 퍼오거나 알리는 것이 꺼려졌다. 아니, 오히려 그 기사가 많은 분들에게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스스로에게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내 평판과 이미지를 지키려고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때문에 이렇게 행동하는 것인가?


자,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이 기사를 열어 보면서 내 머리 속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복기해야만 했다. 

1. (썸네일 사진을 보자마자) 아니, 사진이 이게 뭐야?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왜 하필 이 사진을?
2. (기사의 도입부를 읽으며) 아니, 내 나이를 잘못 쓰셨네? 아까 전화로 물어보셔서 말씀드렸는데 왜 이런 실수를? 내가 이렇게 나이들어 보였나?
3. (기사 중간 부분에서) 음, 그런데 내용은 정말 잘 정리해주셨는걸? 인터뷰 질문이 명상에 관한 것이 많아서 너무 철학적일까봐 걱정했는데 우리 마보앱을 잘 다뤄주셨느걸?
4. (문제의 '붓다처럼' 이라는 문장을 보고 나서) 앗!!!!!!!!!!!!!!!!!!! 어떡하지? 이게 나가면 명상하는 분들이 오해할텐데! 내가 마음챙김 명상을 잘 모른다고 할 꺼야. 저번에 학회 초대받아 갔을 때도 마보를 사용도 거의 안해본 분들에게 마보가 이완을 위한 명상만 하는 것 아니냐는 공격을 받았는데 이번에 이 기사까지 나가면 '이것 봐... 이 여자는 마음챙김 명상도 잘 모르면서 명상앱을 만든 거야.'라고 또 나를 판단하고 비판하겠지. 아, 이것만이라도 막아야 해! 

이런 생각과 판단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어떤 패턴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선 나는 이 기사가 얼마나 짧은 시간동안 마보와 마음챙김 명상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지 훌륭한 점을 찾기 전, 신경을 곤두세우고 무엇이 틀렸을지 나에게 흡족한지 아닌지부터 찾고 있었다(인간 사고의 부정편향의 훌륭한 예이다.). 사진부터 내가 원하는 내 모습(보통 자기 실물보다 조금 더 잘 나온)이 아니라 내 실제 모습에 가깝다는 이유로(이 문장을 쓰면서도 사실 내 마음에 미묘한 저항감과 혐오감이 올라오고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워하고 있다.) 기자님에게 바꿔 달라고 떼를 쓰면서 말이다. 이 기사가 마보를 알리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지 잘 알기에 그런 이유로 인터뷰에 응했으면서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내 사진이나 나이에 먼저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다 '붓다처럼' 이라는 말이 잘못된 위치에 있는 걸 발견하고 내 모든 주의는 온통 그 네 글자에 꽂히고 말았다. 참 신기한 것이 그때부터는 내 사진이나, 내 나이는 덜 중요하다고 느껴졌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네 단어를 지울수만 있다면 이 기사가 완벽해질 것처럼 여겨졌다. 이건 더이상 내 개인적인 집착, 즉 내 사진이나 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더 중요한 명상의 목적, 붓다의 진리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즉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가치있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에는 '나는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 ' 이 기사는 수정되어야 한다.' 라는 아상(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옳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그 옳음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방에 대해 답답함을 넘어 약간의 분노까지 느껴지시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이 일어났다. 바로 내가 이 글을 쓰기로 한 그 통찰말이다. 그건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스스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는 붓다의 말을 올바르게 전하지 못했다는 자괴감보다 사실은 훨씬 더 큰 마음으로, '유정은이, 마음챙김 명상의 전문가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이런 얘기를 하고 다니면 마음챙김 명상을 수행하시는 많은 분들이 나를 비판하거나 비웃거나 공격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나를 보호하고 옹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로서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고 싶어하는 '나', 마음챙김 명상의 전문가로 알려 지고 있는 '나' 말이다. 진리나 진실과 상관없이,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내 마음에 드는지 안드는지가 옳고 그름의 잣대에 영향을 끼쳤다. 


자. 나는 이제 이 브런치 글을 통해 이 기사를 처음으로 내 주변 지인들과 공유하려 한다. (내 개인 페이스북에도 올리려 한다.) 이 글을 공유하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우선 첫번째는, 우리가 마음챙김 명상을 통해 닦은 알아차림을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 가져와 내 생각과 행동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 이 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여러분들의 기억에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회사에서, 집에서, 혹은 친구 사이에서 여러분도 스스로 옳다고 믿으며 주장했던 많은 것들이 결국 스스로의 아집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일 말이다.
그리고 사실 부끄럽지만... 두번째는... 내가 '붓다처럼' 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아직까지도 면피하고 싶은 마음이 솔직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의 명상 스승이신 잭 콘필드 님의 책을 보면 "Beyond Praise and Blame" 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깨달은 자로서 마지막 경지는 다른 사람의 책망이나 오해에도 초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너무나도 범속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책망이나 오해가 두렵다. 지금은 그게 바로 나다. 

다른 사람의 오해나 책망에 대한 억울함을 견디는 것, 아니 그 자체에 초연해지는 것. 지켜야 할 명예나 아상 없이 자유로워지는 것. 아마 그것도 언젠가 '붓다처럼' 되기 위한 길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그 연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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