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무비패스05
만약 당신의 인생이 고단해서 머릿속에 걱정 근심이 가득한 데 잠시 짬을 내서 극장에 영화를 보러 왔다면 <트립 투 스페인> 말고 다른 영화를 봐야 한다. 컨디션이 무척 좋고 달달한 케이크라도 실컷 먹어서 눈이 스르르 풀릴 정도로 느슨한 상태라면 <트립 투 스페인>을 봐도 좋겠다. 꽤 돌려 말했는데 <트립 투 스페인>이 좀 지루하다. 말 많은 친구(남 말고 친구임)를 앞에 두고 두 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내가 좀 여유롭다면 모를까. 직장 일이라든가 돈 걱정 또는 인간관계 때문에 속이 시끄럽다면 아무리 입담 좋은 친구라도 그애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 없잖은가.
<트립 투 스페인>은 텔레비전 시리즈인 <더 트립>의 영화 확장판이다. 두 남자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찾아가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으며 예술과 문학, 대중 문화,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영국과 이탈리아에 이어 세 번째 여행지가 스페인이다. 영국 배우인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은 실명으로 출연해서 영화 속에 자신들의 진짜 인생을 살짝 걸쳐두었다. 배우이자 제작자 각본가로도 활동하는 중년 남자인 이들은 영화의 재료에 자신의 삶을 조금 떼어서 내준다.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은 두 남자를 스페인을 데리고 가서 그들의 수다에 스페인 내전에 대한 글을 쓴 조지 오웰이나 돈 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를 끼워 넣는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유명인들을 흉내 내는데 우리가 그들이 성대 묘사를 하거나 특징적인 외모를 흉내 내는 인물을 안다면, 혹은 영어 문화권에서 오래 살았다면 분명 같이 웃겠으나 그렇지 못 하다면 이게 꽤 웃긴 상황이라는 정도만 알아챌 뿐이다.
간간이 드러나는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경들. 그리고 중년 남자 2인은 일과 사랑 그리고 자식 문제로 갈팡질팡한다. 대화 대화 대화 대화.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지다가 영화가 끝난다. 이런 영화를 뭐라고 해야 할까?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스페인에 관해 엄청나게 공부하고 자료를 조사해서 배우들과 공유했다고 한다. 배우들이 각본의 내용을 외워서 연기하기 보다 스스로 이해하고 ‘대화’하도록 원해서 그렇게 작업을 했다는 뜻인데, 이런 영화를 기획한다면 제작자 입장에서 충분히 시도하고 싶은 작업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도와 그 결과인 완성품을 만든 제작진들이야 작업 과정이 즐겁고 의미심장했겠지만 관객들은 그들, 즉 감독과 배우들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공유했을 ‘정념’을 함께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게 아쉬운 지점이다. 만든 이들은 충만하나 보는 이들은 좀 지루하고 극장에 오간 시간이 아쉬울 수도 있겠다.(호불호가 분명히 갈린다는 뜻이다) 텔레비전 시리즈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이어가야지 텔레비전 시리즈의 성공에 취해 다른 매체로 섣부르게 넘어갔다가는 자기들만 좋아죽고 끝날 수도 있다고 알려주는 작품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