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은 보이지 않는 칼질이다.
학부모의 갑질을 버티다 못해 자살한 교사의 뉴스를 봤다.
이번 사건은 운이 좋아 뉴스를 타고 유명해진 것이지 이전에도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자신과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한편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면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해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상대방을 깎아내리려는 모습들. 수년 전부터 뉴스에서 보던 행위들이다.
사람들은 그런 뉴스를 보며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구나, 못된 사람이다, 하며 혀를 쯧쯧 찼다. 그걸로 끝이다. 카페나 술집에서 잠깐의 대화로 사라진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나와 관계없는 사람의 이야기에 자신의 일처럼 공감하는 것은 정도가 지나치다 생각한다.
나 하나 살기 바쁜 세상이기에 그것들은 필수적인 마음가짐으로 굳어진다.
‘너랑 관계도 없는 일에 왜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야?’
타인이 곤란하거나 위험한 일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일처럼 나서는 사람들에게 따라붙는 꼬리표이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과민반응이라 말한다. 잘못된 일인 것은 맞지만 굳이 나서야 하는 거냐고,
흉흉한 뉴스가 만연한 요즘, 그런 말은 상대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남의 일에 나서다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학부모의 갑질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한 교사의 사건.
가해 학부모와 동일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학부모는 그게 무슨 대수냐고, 그 교사의 마음이 나약한 것 아니냐 반문을 할 것이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갑질인지, 내 아이를 위해 의견을 낸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냈으면 부모의 역할은 끝이다. 출퇴근하는 보통의 직장인들처럼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잘 다녀왔냐고, 학교생활은 어땠는지, 재미있는 일은 있었는지 따위만 물으면 된다. 부모의 역할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학벌이 중요한 세상이기에 과도한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이런저런 이유들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전가한다.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 채로.
‘교사가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교사의 역할이 무엇인가?
교사는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가르치는 범주를 어디까지 둘 것인가? 십여 명 이상의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교사에게 자신의 아이만 조금 더 봐달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차별이다.
‘사소한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지만 단순한 호의로, 거절하고 싶지만 뒤에 따라올 불편함이 귀찮아서 그것을 행했다면 다른 부모에게서도 마찬가지의 사소한 부탁들이 쏟아진다. 그것들이 모이면 과도한 위협이 된다. 부탁을 행하는 부모들은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잖아? 라며 자신의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도 넘은 의견이 판을 친다.
학생이 볼 수도 있으니, 등의 이유로 카톡 프로필이나 인스타를 검열하는 학부모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보통의 사람들처럼 사진을 올리지만 ‘아이가 볼 수 있다’ 는 이유로 제재를 가한다.
월권이다. 누군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옷차림이, 말투, SNS가 이러면 안 된다고 손가락질을 하면 고칠 것인가? 자신만의 기준을 평균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학교는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장소이다.
학교의 역할은 의무교육 이외에 나와 다른 타인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가치관을 넓혀가며 세상에 다양한 사람, 다양한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워가야 한다.
그것을 부모의 시선에서 차단하는 것은 아이의 주위에 돌을 쌓아 우물에 가두는 꼴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부모의 편협을 답습하며 차별을 야기한다.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다음에 외양간을 고칠 것인가?
이미 낡아 흔들거리는 외양간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이다.
현재의 차별이 후대에 남지 않도록. 구멍이 난 곳에 대충 못질을 하며 사건을 무마시키는 것이 아닌 문제가 있는 곳은 부수고 다시 만드는 과감함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