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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몽이 Nov 10. 2022

못난 목회자와 갈등이 있을 때

하나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1

1.

교회를 다니면서 괴롭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전보다는 뭔가 성장하기 위해, 몰랐던 것을 깨닫기 위해, 지친 현실에서 잠시나마 위로받고 쉬기 위해, 실망했던 마음을 다시 희망으로 바꿔보기 위해 교회도 다니고 종교생활도 하고 의미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 마련이겠죠.


그런데 교회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목회자와 관계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앞쪽 높은 곳에 주로 서 있는 사람들, 교회라는 곳에 자기 사무실이 있거나 자기 책상이 있고 자신의 유선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목사, 전도사, 통칭 목회자 또는 교역자로 불리는 이들입니다. 스스로는 공부한 것에 비해 박봉이고 대우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지만 일반 교인들 입장에서 볼 때 목회자들은 주로 서서 말하고 주장하는 입장(게다가 마이크에 대고), 교인은 서 있기보다 앉아 있어야 하고 말하기보다 들어야 하는 입장입니다.


아무리 학교에서 교사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학생들은 책상에 앉아 선생님 수업을 1시간 동안 꼬박 들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 역시 목회자의 권위가 바닥이 되었다 해도 여전히 교인들은 단체로 앉아 1명 목회자의 설교를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 합니다.


이 목회자(들) 눈에 안 좋게 보이거나 특출 나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무슨 오해라도 생겨 관계가 서먹해지면 교회 다니기가 매우 불편해집니다.


2.

몇 가지 실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목회자도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장단점이 다르기 때문에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설교에 재능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모, 노래 실력, 업무 능력, 대인 관계, 지식수준 등도 개인차가 뚜렷합니다.


설교 20~30분 분량을 매번 온전히 자신만의 통찰과 창작으로 채울 수 있는 목회자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도 참고서적이 있습니다. 성경 해설서, 설교집, 예화집, 요즘에는 아무래도 인터넷이 주 참고 자료가 됩니다.


어떤 목회자는 설교에 예화가 없으면 설교 구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예화 중독 설교를 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이 제발 예화 대신 목사님이 깨달은 바를 설교하든가 차라리 성경에 있는 이야기만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예화를 즐겨 사용하는 목회자에게 예화를 사용하지 말라니 설교를 준비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여태껏 예화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기까지 했던 목회자에겐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목회자는 아무리 바꿔보려 해도 자신의 설교 스타일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결국 설교를 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예화를 또 사용하였고 은혜받지 못하여 괴로워하던 교인들은 이런 과정이 반복되자 그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남아 있던 교인들도 예화를 쓰지 않고는 설교 못하는 목회자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불우하게 성장하였으나 공부를 열심히 하여 명문대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임한 교회에서 가난한 교인들과는 관계가 원만하였으나 형편이 넉넉한 중산층 이상 교인들과는 관계가 이유 없이 어색하였고, 설교에서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든지 부자는 천국에 가기 어렵다든지 성경을 자신의 억하심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인용한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결국 크고 작은 원성과 다툼이 쌓여 그 목회자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성격 상 무척 자존감이 낮고 방어적인 태도로 교인들을 대합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감추고 매사에 솔직한 모습보다는 변명처럼 들리는 설명을 자주 합니다. 그에 비해 아주 작은 일이라도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는 대대적으로 포장하여 온 교회에 들리게 합니다. 목회자도 실수할 때가 있는데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에 더 실망하고, 당연히 겸손하리라 기대하는 목회자에게 겸손 대신 남사스럽게 느껴질 돈 자랑, 자식 자랑, 동의할 수 없는 자기 자랑을 듣게 될 때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그만 얼굴조차 보기 싫어집니다.


3.

마땅히 선생님으로 삼고 배워야 할 위치에 있는 이들이 전혀 본이 되지 못해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성경에도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윗물이 오히려 탁하고 아랫물이 맑은 경우입니다.


사울 왕과 소년 다윗의 관계가 그렇고 늙고 비대해진 엘리 제사장과 어린 사무엘의 관계가 또 그랬습니다.(구약성경 '사무엘상')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 다윗을 이끌어 주었어야 할 사울 왕은 도리어 소년 다윗을 질투했고 나아가 여러 차례 죽이려다 실패합니다. 엘리 제사장도 그 밑에서 훈련받는 어린 사무엘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어른이 전혀 되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과 엘리 제사장은 어린 다윗과 사무엘 입장에서 봤을 때 개혁의 대상, 극복의 대상, 누가 봐도 잘못된 권력자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다윗과 사무엘의 생각뿐만이 아니었고 여론도 두 사람의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사무엘의 처신은 참 흥미롭습니다.


다윗은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사무엘상 24:11-12)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의 부당함에 대해 의사 표시는 하되 실제 자신의 손으로 보복하지는 않고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사무엘은 어땠을까요?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사무엘상 3:5)

존경할 것이 하나도 없는 엘리의 명령에 쏜살같이 달려가 순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평상시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을 대하는 자세가 보입니다.


4.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처신의 일관성이 우리들에게 여전히 놀라운 이유는 상대방이 못나고 잘못됐다고 해서 내가 자동적으로 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져 어떤 말과 행동을 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깨우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3)

사울 왕도 다윗보다 못났고 엘리 제사장도 사무엘보다 부끄럽다 모든 사람들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사무엘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윗물을 즉결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여론을 등에 업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몰아세우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았습니다. 즉 사울 왕과 엘리 제사장에게 스스로 심판하는 하나님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는 깨끗하고 상대적으로 옳을 지라도 판단의 칼날을 휘두를 정도의 권한은 일개인에게 주어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권한을 갖는 완전무결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과 동격이신 독생자 예수님도 악순환의 맞드라이브를 걸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신 악순환의 고리에 용서와 기도와 사랑으로 틈을 만드셨습니다.


5.

요즘 행복하지 못한 기독교인들이 많이 보입니다. 목회자들을 욕하고 흉보고 교회가 큰 일 났다는 이야기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들립니다.


하지만

못난 목회자들이 만들어 내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욕을 하고 흉을 보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우리에게 남겨집니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실제 우월했던 다윗, 사무엘, 예수님께서도 판단의 자리에 앉는 대신 기도 자리에 무릎을 꿇으셨던 것처럼 할 말은 하되 그 말의 근본이 원통함과 보복심리가 아니라 깊은 기도로부터 우러나오는 애통함과 긍휼함이어야 함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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