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에 실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보기 위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먼저 이야기하려 합니다.
성공한 사랑이라면 우선 현재도 잘 진행되고 행복한 관계여야 적어도 실패하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든지, 현재 만난 지 몇 주년이라든지, 현재 정말 만족스럽고 고맙다든지 '사랑의 현재성'이 사랑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아무리 서로 뜨겁게 사랑했다 해도 그것이 전에 그랬다, 지금은 헤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소식이 끊겼고, 지금은 좋은 추억으로 남기기로 했다면 두 사람 사이는 사랑을 지속할 수 없는 실패 요인이 너무 커져버린 상태입니다.
실제 관계를 시작조차 못해본 외사랑이나 서로 간 충분히 무르익는 단계까지 가보지도 못한 사랑은 당연히 성공한 사랑이라 하기에 부족한 것이 많게 느껴집니다.
고등학교 시절 버스정류장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던 사람에게 감정을 키워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가가 말을 건넬 용기도 없었고 그런 용기를 낼 만한 이유가 뚜렷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다 독서실에서 자주 마주치던 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옮겨 가기도 했다가 우연히 보게 된 초등학교 동창생의 성장한 모습에 아주 잠깐 심쿵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추억을 소환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 속에서 발전시켜 보기도 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다 아스라이 안갯속 공상뿐이었습니다. 친구들의 허세 섞인 연애담을 들으며 난 아직 사랑을 하기에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 무거운 가정 분위기가 더 큰 현실의 벽으로 다가왔습니다.
2.
마음속에만 있던 미숙한 사랑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현실 걸음마를 겨우 떼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처음엔 독서토론 모임에서 알게 된 기독교인 선배에게서 고등학교 시절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그다음엔 나이 차가 제법 났던 교회 선배에게서, 그다음엔 교회 동갑내기 친구에게서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번엔 혼자 느끼는 감정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이고 상호적인 관계로 조금씩 진전됐습니다,
교회를 다녔지만 대학생이니만큼 남들처럼 호감이 가는 사람과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카페, 맥줏집, 주점에도 꽤 자주 앉아 있었습니다.
첫 키스의 기억은 설레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이런 건 사랑의 감정까진 아니겠구나 하는 마음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던 꽤나 복잡한 감정으로 기억됩니다.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사랑이었는데도 정작 내 개인 상황 속에서 부딪히고 좌절하던 사랑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어디에 있는지 친절한 안내는 없었습니다. 다른 일들처럼 그냥 혼자 알아서 찾아내거나 교회 밖 자칭 타칭 연애 전문가들의 비전문적 정보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사랑, 연애, 결혼 등에 대해서 혼전순결, 거룩한 신부, 구체적인 기도로 미래의 배우자 기다리기 등을 가르치긴 했는데, 그것이 꼭 학교 보건 시간에 가르치는 성교육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론 속의 세상과 이미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었던 거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인간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삼으셨다는 이야기는 그저 교리 암송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누구 탓일 수도 있겠고 내 개인 상황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마음까지 와닿는 이해나 감동은 별로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려면 으레 그렇게 당연히 믿겠거니 하는 정도였고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설교자들도 정작 교리적 외침 말고는 자신만의 언어로 제대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조금만 질문이 어려워지면 화를 내거나 얼버무리거나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유형의 목회자들을 보는 것도 한심했습니다.
태어나서 사랑을 처음 접하는 가족 안에서도 사랑이 이토록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왜 이렇게 당신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인가? 현실에 실제하는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있는 것인가? 늘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버스정류장이나 독서실, 교회나 각종 모임에서 설렜던 사랑이 내게 잠시나마 위안이 된 구체적 사랑이었습니다.
3.
글쓰기 모임에 다니던 어느 날 그 사람이 대뜸 내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엎드리는 듯싶더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 반짝이는 눈과 미소 띤 표정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그 사람에 대해서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감정도 없었던 관계가 그 순간 갑자기 미친 듯이 사랑해야 하는 관계로 변했었습니다. 이런 게 정말 총 맞은 것 같은 느낌이구나, 운명의 방아쇠가 당겨진 느낌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사랑에 취해 한동안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바보짓을 많이 했습니다. 매일 편지를 쓰고 무작정 그 사람 집 앞에 서서 혹시나 잠깐 나오지나 않을까 몇 시간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결국 사랑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냥 호기심에 몇 가지 질문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지극 정성으로 표현하길래 자신도 노력을 해봤지만 도저히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사람이 진짜 좋아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들도 연결이 안 됐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 느꼈습니다.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내 삶의 가치에 그렇게 큰 타격을 입힐지 미처 몰랐습니다. 내게 정말 큰 결함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한없이 초라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만회하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랑에 반드시 성공하겠다, 칠전팔기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짚신도 짝이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사랑을 쟁취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도전하고 실패하기를 거듭했고 오는 사람도 막지 않아 보았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이다 보니 어른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청년들이었던 자녀들의 연애사에 관심을 갖고 은연중에 사돈 맺기 원하는 집안의 젊은이들과는 잘 되길 응원하고 원치 않는 집안과 연결될까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왜 그리 민감했는지 이해는 조금 되지만 당시에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차별 의식, 속물근성이라고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교회 다닌다는 어른들이 저렇게 집안 따지고 외모 품평하고 직업 따지고 돈 따지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 분노했습니다. 부모가 추천하는 사람은 마음에도 들지 않았지만 일부러 어깃장을 놓고자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교회 어디에서도 내 삶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4.
누군가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하고 내 모든 약점까지 이해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완벽한 사랑에 대해 갈증이 깊어질수록 그에 미치지 못하는 내 현실이 괴롭고 괴로움이 더할수록 관계에 자신감을 잃고 지쳐갔습니다.
그 무렵 인생에서 처음 겪어 보는 두 가지 큰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어느 날 비교적 친했던 후배가 보여준 친구들 사진 속에서 눈길이 가는 한 사람을 보게 된 일이었고, 또 다른 사건은, 100명 정도 모인 자리에서 통성 기도를 하다 경험한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여러 사람이 있는 사진이었는데 유독 그 사람의 표정과 서 있는 모습이 양각으로 튀어나와 입체감이 느껴졌고 이 사람과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운명적 사랑을 하게 될 것 같은 기대감에 마음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통성 기도라면 거부감이 먼저 들었던 터라 그다지 내키지 않았었는데 그날 그 순간 삶의 무게가 너무 답답하고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는 현실에 큰 소리라도 외치고 싶었는지 통성 기도 소리에 몰래 숨어서 소리 내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내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습니다. 어느 정도 기도했을까 나도 모르게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제 자신을 느끼며 저 스스로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성령체험이라는 것인가? 도대체 이게 뭐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신앙을 추구했던 자칭 지성인의 입장에선 다소 민망한 장면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두 가지 사건이 그동안 나도 모르게 고수하고 있었던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사랑이라는 것은
①어떤 완성된 형태의 사랑이 있어서 내가 그것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야 하고 갖은 노력으로 성취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나갈 생각만 했지 간과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정적인 부분,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 기다림 속에서 내가 준비되는 것이 더 중요한 요소라는 걸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②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때도 위의 사건 이전에는 수동적이고 냉소적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표면적인 현상들을 보고 실망하고 괴로워만 했지 정작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혜성처럼 나타나서 내 불편함을 빨리 해소시켜주기만을 바랄 뿐 내게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을 다시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께서 사랑을 표현하실 때 그저 말로만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신 것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방식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독생자를 사랑하는 세상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에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첫째, 일단 하나님께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가치=독생자 예수님이 있었고, 둘째, 이것을 사랑하는 세상을 위해 주시는 포기와 희생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는데 하나님 사랑의 시작점은 독생자 예수님='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나님만의 가치'였다는 거죠. 예수님이 없었다면 하나님 사랑이 시작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관계는 이 고귀한 자신만의 가치가 상대방에게 전달됐을 때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결과가 나타나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성립된다는 원리입니다. 사랑을 하고 있는데 둘 다 피폐해진다든지 한 사람만 행복하고 다른 편은 불행하게 느끼게 된다면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가짜 사랑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내게 사랑하는 관계를 형성할 만큼의 소중한 나만의 동력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내게만 있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교환 불가능한 원본의 사랑을 갖춰야 비로소 사랑을 올바르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만의 고유 가치가 준비되었다면 그 고유 가치를 나누어 유익하게 하고 생명을 살리는 관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만남은 대체로 우연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표현을 쓰자면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이들과 운명적인 관계를 형성하실 때 참 다양한 모습으로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셨고(나다나엘), 존경하는 선생님(세례 요한)의 추천으로 만남이 성사된 경우(안드레), 동생의 권유로 만남이 시작된 경우(베드로), 같은 동네에서 어울리다가 보니 알게 된 경우(빌립),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경우(수가성 여인),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경우(니고데모, 부자 청년)...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경우의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만났는가 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님은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을 만나셨고, 사랑을 주셨고, 예수님 사랑 때문에 삶이 바뀐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5.
사랑할 준비가 됐을 때 사랑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로를 충만하게 하고 성장하게 합니다. 더욱이 이 사랑은 지속됩니다. 더 깊어지고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고맙습니다.
또한 그 사랑 때문에 전에는 감히 용기 내지 못했던 일에 도전하게 되고 기쁨으로 자원해 어려운 환경에 처하길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의 선물을 들고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살고 나도 행복하고 그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게요. 나아가 이 사랑의 연쇄반응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좀 더 살 만해졌다'고 고백하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