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7
1.
한때 학생들 위에 폭력적으로 군림하는 교사 권력이 얼마나 지독했었는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사실적인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과거에 교사가 앞장서는 성적표 조작이나 시험 문제 유출도 흔한 일이었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교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모들이 촌지 공세를 벌이는 일도 공공연했습니다. 학부모 상담 때 아예 현금 봉투를 상담 전에 넣도록 책상 서랍을 조금 열어놓는다는 선생이라는 자들의 대담한 무용담도 쉽게 들을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는 교사일수록 학생들을 대놓고 차별 대우했습니다. 매사에 부끄러움이 없고 당당한 거죠. 학생들 입장에서 분명히 같은 상황인데도 학부모가 자주 학교에 오시고 개인 후원(?)을 많이 하는 학생에게는 관대함이라는 대우가, 돈은 커녕 부모와 연락조차 되지 않는 말썽쟁이들에게는 무차별 따귀와 심지어 이단 옆차기도 등장했습니다.
매일 눈에 보이는 차별을 경험하는 아이들 마음에 큰 멍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보다 시스템이 열악했던 예전 교육 환경에서 모든 것을 교사 개인 역량에 기대어 학교를 운영했던 점은 참고를 해야 할 것입니다. 교실 비품, 학교 시설, 교사 회식비, 각종 운영비 명목으로 후원금을 모금해야 했던 교사들 입장에서 열심히 돈을 싸다 나르는 학부형과 애들만 맡겨 놓고 나 몰라라 하는 학부형의 자녀들을 볼 때 자신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을 것입니다.
기독교 계통 학교들도 다를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학생 전체가 모이는 강당이 없어 교회 예배당을 주중에 학교 강당으로 사용하는 미션스쿨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학교에 채용되려면 '세례 교인 이상' '출석교회 담임목사 추천서'는 필수 서류입니다. 그 교사들 중에도 때리고 돈 봉투를 밝히고 아이들을 차별하는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2.
예수님 당시에도 차별 때문에 일어나는 아픈 상처들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누가복음 15: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8:11-1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한복음 8:3-5)
내가 특정 부류의 사람보다 더 나은 인간이라는 자의식은 때로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그 표현에 차이가 있고 태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나 자신을 옳게 여기고 상대방은 멸시하거나 미워하거나 천하게 여기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관계의 결과가 결코 공존이나 상호이해, 평화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차별, 혐오, 갈등, 유무형의 폭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더욱 못된 것은 '~~ 하는/라는 것들' 'OO 출신들은 다 그렇더라?' 이런 방식의 집단화, 일반화를 통해 개개인의 다양한 상황과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판단하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잠재적 악마로 경계하게 됩니다. 지금은 이 사람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지만 다음번엔 누가 걸릴지 모르는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예수님 당시 대중들 정서 상 가장 미움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들이 위의 성경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국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를 착취하는 세리, 각종 종교 계율을 어기는 불의, 개인 욕망에 경도되어 있는 음행, 뭔가 옳다는 여러 기준에 미달되는 죄인이 나쁜 편 역할을 맡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좋은 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언제든지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대중들입니다.
세리는 로마 제국의 동포 세금징수원/공무원/앞잡이라 하겠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도 북받치는데 제국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은 두렵고 같은 동포가 제국의 충실한 하인 노릇을 하며 상대적인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으니 누구네 아들, 누구네 아버지였을 것이 분명한 세리들이 공적이 됐을 것은 뻔합니다.
'나라를 왜 잃었는가? 그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부터 자주독립은 시작된다'는 논리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식민지배의 고통을 받는 이들이 취할 수 있는 흔한 대응 논리 중 하나입니다.
대개 강경파는 테러나 무장 독립 투쟁으로 치우치고 온건파는 (종교) 교육을 통해 자강, 자립을 꾀하고자 하니까요. (종교) 교육으로 자립 자강을 외치는 부류의 약점은 나라를 빼앗은 제국에 대한 분노 표출을 종교 생활을 소홀히 하거나 공부하지 않는 열등생들에게 나라 잃은 분노를 대리 표출하며 식민지가 지속되는 책임을 동포들에게 물게 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종교 경찰이나 심판관으로 자처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쉽게 말해 종교 고위직 학자)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사는 괴로움이 더해질수록 일반 백성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식민지 생활의 문제 해결로 제시하는 방법이 하나님 계율을 제대로 이행해서 그 은혜를 입어 자강 자립을 해야 할 텐데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형태의 소수 권력자들이 다수 대중을 공갈 협박하는 손쉬운 방식이 바로 '일벌백계'입니다. 한 놈을 죽도록 패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교육하는 거죠. 아무리 악질 교사라 해도 전교생 모두를 때리자니 체력도 안 되고 손도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한 놈만 제발 걸려라!'하고 덫을 놓고 기다릴 때 실수든 정말 잘못을 했든 누군가가 걸려들어 본보기 희생양이 되고 맙니다. 영화 [두사부일체]에서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긴 했지만 바바리맨이 등장해서 학생들이 웃고 있었건만 교사는 자기를 비웃는 줄 알고 평상시 만만한 말썽쟁이를 본보기로 골라 뺨을 때리기 시작합니다.
3.
예수님이 제시한 전혀 다른 방식의 문제 해결 방법은 너무 충격적입니다.
가치관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과 그에 자의 반 타의 반 동의하고 있었던 대중들이 대체로 공감하는 영역조차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시 바라보길 원했습니다.
세리는 그야말로 민족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으로 비난하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저 공무원 하는 심정으로 안정적인 직장이어서 선택한 부류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을 기회로 직권남용과 비리를 일삼는 세리에 이르기까지 일반 대중들 눈에 비치기에 차이점은 없어 보였습니다. 스님은 도박꾼이고 목사는 사기꾼 성폭행범으로 낙인찍힌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보기에도 같은 부류로 낙인찍힐까 봐 두려워했던 세리들과 같이 어울리고 모임과 회식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의 눈치라곤 전혀 보지 않는 대담한 성격이었거나 사람들의 이목을 일부러 끌어서 드러내고자 하는 특별한 의도가 있지 않고선 이렇게 무리한 일을 벌일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을 설득력 있는 유명 인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라도 이미지 관리는 필수였을텐데 말이죠.
현장에서 음행으로 잡혀온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 태도도 상당히 논란거리입니다.
요즘 말로 이건 빼박입니다. 대중들이 즉결 처형을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현행범입니다. 거기에 그럼 같이 있던 남자는 어디에 두고 여자만 잡아 왔느냐? 함정 수사 아니냐? 너도 지난번에 그 여자랑 잤다고 떠벌리더니? 이런 합리적 의심도 인민재판 앞에선 감히 발설되지 못합니다. 입 뻥끗하는 순간 현행범 여자와 동일선상의 비난을 받으며 문자 그대로 돌을 맞을까 두려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의 평판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내놓고 음행 했다는 현행범 사형수 여인의 편에 섭니다. 예수님을 포함하여 현행범 여인뿐만 아니라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죄'가 있음에도 여인을 변호했다는 것이 상당히 충격적인 인상을 줍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한복음 8:10-11)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현행범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죄가 없다고 본 것이 아니라 '정죄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몰려들었던 모든 이들이 정의라고 내세우던 기준, 즉 법 위반 유무를 정하는 규정과 그 규정을 집행하는 권력이 정한 방식으로 똑같이 따라서 판단하거나 비난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다는 거죠. 쉽게 말해 남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독자적인 사유를 거치지 않는 즉각적이고 집단적인 일반화가 불러올 수 있는 오류를 피해 가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 역지사지의 사유 방식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한복음 8:7)
예수님이 상황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추천하는 방식이 바로 이 방식입니다.
상대방을 깎아내려서 내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방식, 상대방이 틀렸다고 몰아세우면서 자신의 옳음을 확인하는 방식, 상대방을 미워해서 삶의 이유를 찾는 방식은 차별과 갈등과 폭력을 낳을 뿐 더군다나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식민지 백성 입장에서 아무것도 이로울 것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을 비난하는 손가락질, 상대방을 향해 들었던 돌팔매는 언제든지 바로 내게도 돌아올 수 있는 혐오와 차별의 근거로 똑같이 작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내 돌팔매는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차별과 혐오의 악순환에 기여할 뿐이라는 거죠.
세리가 나쁘다면, 음행 한 여인이 죽일 만큼 잘못된 것이라면 적어도 왜 어떻게 나쁜지 묻고 듣고 대답하는 과정을 최소한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위에서 몇 사람이 정해주는 차별의식, 혐오의식, 일벌백계의 위협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거나 권력자들이 무서워 비겁하게 개인의 다양한 상황을 회피하고 내가 해야 할 마땅한 인간으로서 역지사지의 도리를 방기 하는 모습이 아니라, 같은 고통의 처지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기대하는 공감과 이해, 평화의 세상을 꿈꾸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좀 더 살기에 나아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