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ucyLu Oct 29. 2018

박씨네 똥개의 역사 #1

옆집 강아지, 토미

 박씨네 똥개의 역사는 사실 기구한 이야기다. 


 부끄럽지만 박씨네에서 태어나거나 찾아온 똥개들은 길면 5~6년, 짧게는 1년 정도밖에 머물지를 못했었다. 유기견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지고, 반려동물 등록 인식 칩 같은 것이 생겨난 요즘 같은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불과 20년 전에는 서울에서도 시골 개처럼 대문을 활짝 열어둔 채 강아지를 풀어놓고 키웠고, 저녁때 즘 돼서야 "덕구야, 밥 먹어라~" 부르면 온 동네를 놀러 다니던 똥개들이 그제야 제집을 찾아가는 풍경이 흔했었다. 박씨네 똥개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문 앞에 설치한 한옥 모양의 지붕이 있는 개집에서 잠을 자고, 박씨네가 먹다 남은 찬밥에 국물을 휙휙 말아 놓은 것을 허겁지겁 먹는 것이 그들의 일과였다. 가끔 비가 많이 오는 날은, 현관문 안 쪽의 신발장에 깔아 둔 수건 위에서 잠을 잘 수 있었고, 가족 중 누구 생일 이기라도 한 날은 소고기 냄새가 나는 미역국을 맛볼 수가 있었다.


박씨네 똥개의 역사는 길지도 짧지도 않다. 하지만 박씨네 일원 중 가장 막내였던 나의 유년시절부터, 사춘기, 그리고 대학생이었던 모든 기억에 함께한 박씨네 똥개들. 어려서 내향적인 성격에 친구가 많지 않았던 나에게 가장 든든한 친구가 돼주었던, 나의 등하굣길을 지켜주었던, 사춘기 시절 내 눈물을 닦아주었던, 날이 추워도, 날이 더워도, 내가 울어도, 내가 웃어도,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면 꼬리를 치며 오랜만에 만난 사이처럼 온몸으로 반가워해주었던 나의 소중한 친구들. 지금은 모두 어쩌면 모두 무지개다리를 건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친구들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박씨네 똥개의 역사를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박씨네 똥개의 시작은 옆집 강아지, 토미였다. 당시 우리 집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있던 서울의 어느 주택가에 위치해있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우리 집이었던 그 집. 사계절 은행나무가 가슴을 크게 펼치고 온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돼주었던 동네였다. 집 뒤에는 작은 뒷산이 있었고, 우리 집은 그 뒷산에 기댄 채 자리 잡았기에 집에 가려면 길고 긴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만 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함께 상경한 부모님은 서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결혼을 미뤄야 했고, 30대가 넘어서야 겨우 결혼식을 올리고 1년 후 언니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한민국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일자리가 넘쳐났고, 서울은 정신없이 개발되고 있었을 때였지만 시골에서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서울만 바라보고 상경한 부모님은 딸 하나 먹여 살리는 것도 부담스러웠는데, 4년 후 나마저 덜컥 엄마의 뱃속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하셨다. 동네 집사님의 끈질긴 설득으로, 엄마 뱃속에서 올챙이 시절 저세상으로 떠날 뻔했던 나는 10개월 후 떳떳하게 박씨네의 마지막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느라 바빴고 버티느라 정신없었던 그때, 우리는 화장실도 없는 손바닥만 한 단칸방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며 월세살이를 했어야 했고, 4 식구의 밥 한 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감사했던 시간이었다고 한다(사실 나는 팔다리만 아등바등 흔들어대던 나이였기에 그 당시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온 지 10년을 버티고 버틴 부모님은, 여전히 방은 하나뿐이지만 부엌도 따로 있고, 화장실도 딸려있던 전셋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집에 토미가 살고 있었다.


옆집은 우리 집보다 몇 배는 좋은 빌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빌라의 1층에는 옆동네에서 쌀가게를 운영하는 아저씨 내외가 살고 있었고, 토미는 그 집의 귀염둥이 강아지였다. 먹고 사느라 바빴던 부모님은 식구를 늘릴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생전 강아지를 키워본 적 없던 언니와 나는 옆집에 사는 그 강아지가 한없이 귀엽고 신기하고 예뻤던 것 같다. 쌀가게 아저씨는 토미를 집 안이 아닌 밖에서 키우셨다. 아침 일찍 가게로 나가 늦은 밤 돌아오셨기에, 낮 시간 동안 토미는 온통 우리 자매의 독차지가 될 수 있었다.


토미는 어두운 밤에는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까만 털을 가진 똥개였다. 짧은 다리에, 귀는 앞으로 길게 늘어졌고, 까맣고 똘망똘망한 눈을 갖고 있던 토미는 그 누구도 몇 살인지 알지 못했다. 어린 우리들과 놀아줄 정도의 나이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4~5살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의 아침은 토미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엄마는 집에서 뜨개질이며, 인형 눈을 붙이는 소일거리를 하느라 바빴고, 4살 차이 나는 언니마저 국민학교에 가고 나면 혼자 남은 나는 옆집 토미를 찾아가 종일 토미와 노는 것이 내 하루의 전부였다고 한다. 토미 역시 빈 집을 지키는 것보다, 꼬맹이와 놀아주는 것이 더 재미있었는지, 주인아저씨가 퇴근하고 집에 오기 전까지 우리 집 계단에서 나의 공주 인형놀이를 지켜봐 주거나, 또는 동참하여 공주님의 든든한 말 행세를 해주기도 했었다. 내 기억에 토미는 짖지 않는 편이었고, 제법 점잖은 편이었던 것 같다. 집에서 소일거리를 하느라 바빴던 엄마 대신 토미가 내 보호자가 되어 나의 하루하루를 함께해주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 아저씨는 쌀가게가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사 갈 집은 강아지를 키울만한 곳이 아니었고, 아저씨는 우리 부모님에게 토미를 직접 키우는 것이 어떻겠냐 제안하셨다고 한다. 예전 단칸방 살이를 했던 그 집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이 동네로 이사 온 우리 집은 우리만의 공간이 생겼고, 보일러 실 옆으로 토미가 살 개집을 놓을만한 여유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토미를 무척이나 예뻐하고 좋아하는 우리 때문이었는지, 부모님은 토미를 키우는 것을 허락하셨다. 쌀가게 아저씨가 이사 가던 날, 토미의 개집은 우리 집으로 옮겨졌다. 우리 자매는 토미가 이제 밤에도 우리와 함께할 수 있고, 진짜 우리 식구가 되었다는 것에 무척 들뜨고 기뻤다. 하지만 토미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토미에게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니었을 수가 없었을 것 같다.


개에게 가족은 가족 그 이상의 의미인 것 같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존재이자, 자신이 사는 집이고, 자신의 우주이자 세상이다. 사람들은 개 주제에 그런 것이 있겠냐 싶겠지만, 토미에게 옆집 아저씨 내외는 온 세상이었고 옆집 아저씨 내외가 사라진 것은 온 세상이 무너진 일과도 같았던 것 같다.


옆집 아저씨가 이사 가고, 토미의 집은 우리 집의 보일러실 옆으로 옮겨졌지만, 토미의 몸도 마음도 우리 집으로 쉽게 오지 못했다. 몇 날 며칠을 토미는 원래 제집을 배회하였고, 옆집 아저씨가 항상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 소리만 들려오면 미친 듯이 쫓아가기 바빴다. 그러다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집에 들어갔지만, 이 집이 아니라는 듯 바로 나가 원래 살던 옆집 앞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기 십상이었다. 거의 한 달 동안 방황하는 토미를 보고, 안 되겠다 싶었던 엄마는 이사 간 옆집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토미의 이야기를 전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 옆집 아저씨가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