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량원다오
내 친구 하나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 그를 찾으려면 유선전화의 자동응답기를 통해야 한다. 게다가 그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반드시 하루가 지난 뒤에야 답신을 한다. 사람들과의 소통에 하루만이라도 거리를 두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시간 통신의 시대에 그는 단 하루만이라도 시간의 신성함을 지키려 한다.
과거의 사랑은 시간의 간격때문에 항상 의혹으로 가득 차 있고 불확실성으로 충만했다. 또한 이 때문에 연인들은 보다 많은 신의와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얻고자 하는 답을 당장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황 상태에 빠져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문제가 있으면 직접 전화를 걸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된다. 한 시간 내에 답신이 없으면 불안해지고, 하루가 지나도 답신이 없다면 답신이 없는 것 자체가 답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옛날 영화를 이해하지 못 하고 옛 시를 이해하지 못 하고 사랑을 이해하지 못 한다. 시간은 더 이상 길거나 오래되거나 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는 사라지고 동시의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폴 비릴리오는 생태 위기에 관해 언급하면서 대기층의 오염만 걱정할 게 아니라 '속도층'의 파괴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속도층'이란 교통과 통신의 방식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존재하는 영역을 말한다. 그리고 속도층의 파괴란 '길'의 소멸을 의미한다.
옛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나 정보를 발송할 때 반드시 길을 통해야 했다. 공간적으로는 두 지점의 거리가 있었고 시간적으로는 두 지점 사이를 지나 도달하는 데 필요한 도량이 있어야 했다. 인류는 세계를 인식하는 일이건 자기를 이해하는 일이건, 아니면 그 사이의 관계를 맺는 일이건 간에 반드시 의식 속에 속도층을 설정해야 했다. 시공의 방대함과 한계를 확실히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실시간 통신이 이러한 물리적 세계의 한계를 허물어 버렸다. 광고에서 흔히 말하듯이 이제는 '거리가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거리가 없다보니 길도 없어졌고, 길이 없다보니 출발점과 목적지도 사라져버렸다. 나와 그 사이에 거리도 없고 구별도 없어졌다. 때문에 그는 사라졌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