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커다란 택배가 하나 왔다. 집에 택배가 오면 보통은 내가 정리하는데 그날따라 아내가 정리하겠다며 나섰다. 박스의 테이프를 뜯어내는 아내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택배 박스 여는데 왜 저리 비장해?'라는 의구심이 들면서 왠지 모를 싸함을 느꼈다. 아내가 뭔가 큰 것을, 작지만 큰 것을 산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신중한 표정으로 박스에서 커다란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주머니에 곱게 싸여있는 것은 가방이었다. 검은색 가방은 그냥 가방이었지만 반짝이는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예상은 적중했다. 명품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내가 들고 있는 가방의 로고는 누구나 알만한 것이었다.
"어? 그거 샤넬 아니야?"
"맞아."
"가방 샀어?"
"어. 중고로 하나 샀어."
안에는 샤넬 가방이 하나 들어있었다. 명품도 인터넷을 주문 가능한지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조심스레 가방을 들고 흠집은 없는지 꼼꼼하게 검수하는 아내의 표정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속으로는 "얼마 줬어?"라는 말을 품고 있었지만 섣불리 말을 꺼냈다 상황이 어색해질까 봐 내 속에 올라오는 말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아무런 상의 없이 명품 가방을 덜컥 구입하는 사람이었나? 결혼 때도 작은 지갑 하나 사는 걸로 만족했던 사람이었는데 명품 가방을? 샤넬을? 왜? 얼마나 줬을까? 중고라고 하니 저렴하긴 하겠지? 그래도 샤넬인데? 그런데 저 디자인이 이쁜 건가?
나는 명품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못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특히 명품가방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가방이 백만 원을 넘어가려면 적어도 GPS 기능이 있어 위치추적이 가능해 분실의 위험이 없어야 하고, 지문인식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방탄소재로 되어 있고 방수 기능이 있어 우천 시에는 우산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백만 원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이리저리 살펴보며 만족해하고 있는 저 가방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기능은 없었다. 그냥 커다란 가방이었다. 검은 가죽에 수납공간도 별로 없어 보였다. '샤넬' 로고만 빼면 별다른 특색도 없었다. 이해 못 할 물건이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들고 있지 않은가! 가방은 밉지만 아내는 사랑스럽다. 그러니 속에 있는 말을 정리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천천히 하고 싶은 말을 던졌다.
"여보.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얼마 줬어?"
"중고로 싸게 샀어. 원래는 000인데 000만 원 줬어."
"그래! 여보! 잘했다. 명품백은 하나 있어야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수많은 말들을 삼키고 아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던졌다.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저리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그 기분을 괜한 말로 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표정 관리에는 실패했지만 말은 잘 관리했기에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아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위스키에 빠져있다.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면 아내에게 참 미안하다. 만약 내가 위스키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샤넬백 중고가 아닌 새 제품을 선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남편이 술에 미쳐있어도 웃으며 이해해 주는 아내에게 참 감사하고 샤넬백이 택배로 왔던 그날! 아내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과거의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아직까지 명품가방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방은 물건을 잘 담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나는 이제까지 가방을 사면서 브랜드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기능과 가격만을 고려했었다. 아내가 생일선물이라며 가방을 하나 선물했을 때도 크게 기뻐하며 고맙다고 말했지만 쿠팡에서 삼만 원 정도 되는 가방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길 이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마음이 먼저 들기도 했다.
'이 돈이면.... 글렌알라키 15년?'
가방에는 돈을 써도 술에 돈을 쓰는 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맞다! 나도 그랬다. 무슨 술을 그리 비싸게 산단 말인가. 위스키라고 하는 술은 그저 허세요, 아저씨들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유흥을 즐기기 위해 마시는 술,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괜히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마시는 술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의 가치 밖에 없는데 어찌 그리 큰돈을 쓰면서 마실 수 있단 말인가. 2018년부터 1년에 두세 번은 해외출장을 다녀오곤 했는데 그럴 때 면세점에서 딸에게 선물할 인형 외에는 사지 않았었다. 아! 아내를 위한 팔찌는 하나 산 적이 있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는 어떤 것도 사지 않았다. 나에게는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맥캘란 18년을 샀어야 했다)
그런 내가 조니워커 블랙라벨로 위스키에 입문했고 엔트리급 위스키들을 하나씩 접하면서 조금씩 단계를 높여가고 있다. 오만 원 정도에서 잘 고르면 니트로 즐기기에 괜찮은 위스키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위스키들을 맛보고 한다면 결국 더 좋은 것들을 찾게 될 것이다.
비싸다고 맛있는 건 아니지만 맛있는 건 비싸기 때문이다.
조니워커 블루라벨은 비싸지만 맛있다.
위스키는 경험할 수도록 그 맛을 깨닫게 된다. 처음 마실 때는 오크향 밖에 나지 않는 독한 술이지만 점차 바닐라, 캐러멜, 오렌지, 건자두, 건포도, 사과, 배 등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 점차 단계도 올라가게 된다. 미묘한 맛 차이에 적잖은 돈을 쓰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취미를 누구에게 설명하고 입문시킬 자신은 없다. 나조차도 너무 심하다 느낄 정도로 위스키에 돈을 써대고 있기 때문이다.
위스키나 명품 가방은 사치품이다. 생활필수품과는 거리가 먼 상품이다. 솔직히 술은 가방보다 더 생활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굳이 건강에도 안 좋은 술을 마셔서 돈과 시간, 건강까지 버릴 이유가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술을 좋아하고 위스키와 브랜디 등 증류주를 사랑한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며 좋아하는 위스키 한잔 따라 천천히 맛을 즐기며 하루를 마감하는 그 시간은 정말 소중하고 내일을 다시 살아갈 힘을 충전하는 시간이 된다.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명품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나는 명품을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중이다.
위스키는 사치품이 맞다.
하지만 열심히 고생한 나에게 이 정도 사치는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