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 엄마가 만들어주던 그 카스텔라가.
몸이 아프면 빵이 먹고 싶다. 얼큰한 뼈해장국도 좋고 동태탕도 좋고 해장국도 좋지만 아플 때는 빵이 최고로 맛있다. 감기로 집에 누워있을 때면 빵을 한가득 배달시켜서 끼니를 해결하곤 한다. 빵은, 특히 카스텔라는 나에게 영혼의 음식과도 같다. 아마도 엄마가 어릴 적 만들어주셨던 카스텔라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제는 먹지 못한다 생각하니 더 그리워진다. 30년 전 엄마가 해주던 그 촉촉하고 달콤한 카스텔라가 그리워 여러 조리법을 참고해 만들어보곤 했지만 그때의 그 맛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엄마가 만들어주던 그 카스텔라를 다시 맛볼 수 있을까?
내가 12살 때였다. 나의 부모님은 2박 3일의 일정으로 아버지의 친구 내외와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셨다. 이모부가 차를 바꾸시며 받은 대우 프린스를 타고 떠나시던 날 아침, 다른 것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공기만은 기억이 난다. 촉촉했다. 등교하기 전이었으니 7시쯤 됐던 것 같은데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아침의 공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듯했다. 7월이 시작되던 날 촉촉한 그날 강원도로 떠난 아버지와 엄마. 그날이 엄마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지금은 엄마가 돌아가실 때의 나이보다 내 나이가 더 많다. 기억이 갈수록 흐릿해지지만 가끔씩 생각나는 것들이 불쑥 튀어올라 마음을 흔들어놓고는 한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키가 크고 호탕했으며 요리실력이 뛰어났다. 작은 통닭집을 운영하셨었고 친구와 옷 사업을 하겠다며 포항에서 동대문 시장까지 가서 옷을 사 오곤 하셨었다. 여성들이 운전을 잘하지 않았던 80년대 후반, 여름방학을 맞은 나를 데리고 황금색 프라이드를 직접 운전해 서울 큰집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동네 아저씨들은 절대 하지 말라며 만류했다. 모두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거뜬히 그 먼 거리를 성공하셨다. 내비게이션도 없는 그 시절에 어떻게 서울에 있는 큰집을 갈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다.
기억 속의 엄마는 가끔 이웃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곤 하셨다. 교회 집사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에는 망설임 없이 해내고 마는 멋진 분이셨다.
그런 엄마를 떠나보내던 날,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으니 외아들이었던 나는 홀로 빈소를 지켰다. 친척 어른들이 계셨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 상주가 되어 빈소를 지켜야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엄마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조금 있으면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장난이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친척들은 참 많이 울고 또 울었지만 나는 그렇게 많이 울지 않았다. 울보였던 내가 생각보다 많이 울지 않는다고 친척들이 한 마디씩 하기도 했었지만 나는 아직 엄마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를 염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는 엄마의 시신을 보며 무섭다는 생각만 했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바라보기만 했었다. 마지막으로 인사하라는 말에 어찌할 줄을 몰라 머뭇거리자 이모가 나의 등을 밀었다.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참 두려웠다. 간신히 엄마의 빰에 손을 올렸는데 너무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 빰을 한번 훔치듯 만지고 뒤로 물러났다. 그게 30년이 지난 지금도 후회가 된다. 마음껏 울었더라면, 마음껏 아쉬움을 표현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올라온다.
그동안 내 안에 해소되지 않은 슬픔은 나를 많이 힘들게 했었다. 나는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될 상황인데 순간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고 그 감정에 졌다는 생각에 후회하곤 했다. 그런데 그것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자 그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미숙함을 부끄러워한 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엄마의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내 안의 파도가 조금씩 잠잠해졌었다.
엄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잔에 채웠다. 엄마 없이 중학교에 갔고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아 지금에 이르렀다. 엄마가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하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아프다. 아프지만 또 그립다. 특히 딸을 보고 있으면 더 그렇다. 엄마는 딸을 갖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아들 하나만 낳으셨다. 그런 엄마가 손녀를 보셨다면 얼마나 이뻐하셨을까. 육아를 도와주기 위해 만사를 제쳐두고 우리 집에 오셨을 엄마를 떠올렸다. 손녀를 품에 꼭 안고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맞으며 편안한 의자에서 손녀와 함께 옅은 졸음에 행복해하셨을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손녀를 재우고 나와 며느리와 함께 위스키 한 잔을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엄마를 떠올렸다. 그럴 때 나는 엄마에게 어떤 위스키를 권할까 생각해 봤을 때, 발베니 12년을 떠올렸다.
발베니 12년 더블우드는 부드럽고 달콤하다. 꿀 같은 풍미와 균형이 잘 잡힌 위스키다. 위스키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기 좋은 술이기도 하다. 12년을 아메리칸 오크통에서 숙성하고 셰리 와인을 숙성했던 오크통에서 6개월을 추가 숙성해 완정 하는 발베니 12년 더블우드. 많은 분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기는 한데, 환상적인 맛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적당한 맛이라고 생각된다. 적당하고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술이다. 맛에 집중하기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며 즐기기에 적당한 위스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발베니 12년에 엄마의 카스텔라를 함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팔이 덜어져라 머랭을 쳐 반죽을 만들고 둥근 모양의 전기오븐에 구워낸 카스텔라. 갓 만든 따끈한 카스텔라를 발베니 12년에 살짝 적셔 즐기고 싶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상상을 해본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순간을 나는 비록 가지지 못했지만 우리 딸에게는 선물하고 싶다. 딸이 성장하는 순간 옆에 꼭 있어 줄 것이라 다짐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함께 술을 즐길 수 있게 되었을 때, 아끼고 아끼던 위스키를 하나 꺼내 생색을 내며 잔에 따라주고 싶다. 딸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잠깐식 보이곤 하는데, 그런 딸과 함께 시간을 즐기며 엄마가 만들어주셨던 그 카스텔라를 딸에게 맛 보여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