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위스키를 권했다. 보통은 '난 위스키보다 소주가 좋다'는 답을 듣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위스키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해오곤 한다. 이때 질문은 대게 '어떤 술로 시작하면 좋을까?'라고 물어보고 이내 '위스키는 어떤 안주가 어울려?'라고 물어본다. 그럴 때 난 '위스키에는 물 한잔이면 충분하다'라고 대답을 한다.
위스키 최고의 안주 '물', 멋진 풍경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렇다. 위스키는 '물'과 가장 잘 어울린다. 위스키에 어울리는 안주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를 해 봤다. 초콜릿이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ABC 초콜릿을 한 봉지 구입했다. 위스키 한 모금에 ABC 초콜릿 한 개를 털어 넣었다. 고도수에 지쳐있던 입 안이 진정되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무엇인가 아쉬움이 들었다. 한 모금 홀짝일 때마다 초콜릿 한 개를 먹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입 안에 초콜릿의 단 맛이 쌓이기 시작하면 위스키의 맛을 온전히 느끼는데 방해가 되기도 했다.
다음으로 선택한 안주는 스테이크. 아내와 딸이 좋아하는 치맛살을 몇 덩이 사와 집에서 구워봤다. 유튜브를 통해 열심히 공부한 방법대로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하고 프라이팬을 예열하고 올리브 오일을 흠뻑 둘렀다. 그리고 왠지 고기가 맛있어질 것 같은 바로 그 단어 '마이야르' 반응을 최대로 이끌어 냈다. 마지막으로 버터를 넣어 풍미를 더했다. 아내와 딸은 미디엄 웰던으로, 나는 미디엄 레어로 구워낸 다음 매쉬드 포테이토와 방울토마토를 구워 가니쉬로 곁들였다. 음식을 완성한 다음 러셀 싱글배럴을 잔에 따랐다. 스테이크에는 역시 버번 아니겠는가. 러셀 싱글배럴은 맛있는 술이다. 줄까지 서가며 구할 술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 병쯤 가지고 있으면 참 좋을 술이다. 55도의 고도수가 입 안을 강하게 타격하고 버번답게 바닐라, 견과류, 캐러멜 등의 맛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 과일의 시트러스가 기분 좋게 흩날려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술이다. 소고기의 풍미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소고기의 지방으로 입은 즐겁지만 뭔가 모를 죄책감이 올라올 때 한 모금의 술은 입 안의 기름기를 싹 씻어주고 새로운 풍미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이것도 완벽한 페어링이 아니다.
스테이크를 먹을 땐 와인이 더 어울린다. 음식과 먹을 땐 고도수의 술이 조금 부담스럽다. 아주 조금씩 홀짝이며 그 맛을 천천히 벗기듯 즐기는 위스키보다 저도수의 술이 더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와인이나 맥주처럼 발효주가 가지는 매력이 음식과 더 궁합이 맞다고 생각한다. 고도수의 위스키는 식도를 타고 넘어간 다음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음식의 맛이 조화를 이룬다기보다는 서로 싸움을 벌이는 것 같다. 두 명의 성악가가 서로를 배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누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듯한 부조화를 느꼈다.
회와 스카치 위스키를 먹을 때는 초장과 고추냉이, 막장 등 한국에서 먹는 양념장의 자극적인 맛 때문에 위스키가 맵게 느껴졌다. 피자, 치킨, 불고기, 달걀 프라이 등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이런저런 조합으로 먹어봤지만 항상 아쉽게 느껴졌다. 그나마 가장 좋았던 안주는 견과류였다. 건과일과도 나름 어울렸던 것 같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맛을 방해하는 듯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 아포가토처럼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잭다니엘을 한잔 부어먹는 방식은 참 좋아한다. 하지만 이건 위스키를 온전히 즐기기 위한 방법이라기보다 새로운 형태의 디저트에 가깝다 보니 넘어가기로 하자.
사실 소주는 음식과의 궁합이 아주 좋다. 소주는 개성이 없고 아무런 맛도 없다. 소주를 한잔 따라놓고 잔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향을 느끼고 맛을 음미하기 위해 한 모금 마시고는 한참을 가글 하듯 굴리지 않는다. 그냥 털어 넣는다. 목구멍과 식도를 열고 바로 때려 넣는다. 그리고 뒤이어 올라올 쓴 맛을 느끼지 않기 위해 바로 뜨거운 국물이나 삼겹살 한 점을 곁들어 밀어 넣는다. 한 잔의 소주와 삼겹살 한 점. 이 어찌 아름다운 조화가 아니겠는가.
소주를 싫어하지만,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주는 위안과 포근함은 알고 있다. 소주는 싫어하지만 이런 매력 때문에 마냥 싫어할 수만 없다.
소주는 조연이다. 우리는 '오늘은 무슨 술을 마실까?'라고 물어보지 않는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래?'하고 물어본다. 술은 이미 소주 또는 맥주로 정해졌으니. 오늘 술자리의 주연은 안주다. 소주는 주연의 자리에서 벗어나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때로는 너무 조용해 있는지 없는지 기억할 수도 없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없으면 너무 아쉬운 바로 그런 존재. 늘 주변을 받쳐주는 그런 친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주와 난 아직 친해지지 않았다.
위스키는 개성이 강한 친구다. 개성이 강하고 성격이 불같아 친구를 사귀는데 쉽지 않다. 친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너무 강한 개성과 자기주장이 심해 때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친구가 되고 나면 너무 매력적이다. 그의 단점과 장점을 다 알고 나니 그의 까칠만 말 너머에 있는 진심이 보인다. 소주와 정반대다.
친구에게 늘 맞춰주는 소주. 자기주장이 확실한 위스키. 내 성격은 위스키 같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이 확실하고 좋아하는 것은 끝을 봐야 한다. 마블 세계관에 흠뻑 빠져있고 (망해가는 마블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예능을 사랑한다. 1박 2일 시즌 1은 4~5번 정도 정주행을 했다. 한번 사랑하면 뒤는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잘하고 싶지만 한번 싫어하면 끝도 없이 싫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며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지만 학창 시절에는 끝을 생각하지 않고 질러댔다. 그래서 친구가 없다. 그렇지만 외롭지는 않다. 나의 행동 너머에 있는 진심을 알아봐 주는 토끼 같은 아내가 있어서이다. 여우 같은 딸도 나의 소중한 친구다.
퇴근하고 가족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마치면 나의 자유시간이다. 좋아하는 마블영화 한 편과 좋아하는 위스키 한잔. 친구는 없지만 외롭지는 않은 나의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