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좋아하는 아저씨의 이야기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다 보니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 종종 오해받는다. 하지만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는 못한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고 술 마신 티가 흠뻑 난다. 소주 한 병 정도 간신히 비워낼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 내 덩치를 보고는 '저 사람은 주당이다!'라고 확신했던 사람들이 실망할 정도의 주량이다.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는 못한다.
하지만 잘 마신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운동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무한도전에서 특집으로 다뤘던 조정선수로 고등학교에 갔다. 중학교 체육선생님이 선글라스 끼고 노 몇 번 저으면 대학 간다는 말에 쉽게 선택했다. 내 적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공부와는 더 거리가 멀었기에 내린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중학교 졸업식 전 합숙훈련에서 나의 길이 아님을 알게 됐다.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1km를 달리고는 바닥을 기었다. 코치와 선배들의 욕을 먹어가며 뛰고 또 뛰었지만 매번 죽을 것 같았다. 이 길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없이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다. 무서운 선배들과 잘 나가는 동기들과 함께 난생처음 술집에 들어섰다. 찌들어 있는 담배냄새와 어두운 조명,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은 쩍쩍 달라붙고 한때 조직생활을 했었을 것 같은 사장이 카운터를 지키던 그 술집. 나의 첫 경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내 주량이 얼마인지도 모르지만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다행히도 싱싱한 십대의 간은 첫 알코올을 잘 분해했다. 네발로 기어 다니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마셔댔다.
젊은이들의 술자리는 누가 누가 술을 더 잘 마시는가에 초점이 맞춰있었다.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서 벌컥벌컥 마시고는 이미 혀가 풀렸지만 아직 취하지 않았다며 주야장천 떠들어 대던 동기들.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며 잔뜻 멋에 취해 술을 따라주던 선배들. 안주는 사치였다. 하지만 돈은 없지만 술은 어떻게든 더 시켰다. 안주 한 점 먹을 바에야 술을 더 마시라는 소리를 들으며 점점 취해갔다.
첫 기억이 너무 힘겨웠다. 술은 맛이 없었다. 안주와의 궁합을 즐길 여유는 사치였다. 그 자리를 주도하는 이의 주량에 맞춰지다 보니 따라가기에 너무 버거웠다.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젊음은 값지고 아름답지만 PC방과 노래방, 그리고 술이 모든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우리는 술을 마실 때 옆 사람의 잔을 항상 관찰해야 한다. 마실 때마다 건배를 빼먹으면 안 된다. 군인들이 발맞춰 행진하듯 모두 동일하게 한잔씩 비워나갔다. 술에 '장판'이라도 깔리면 비난의 대상이 됐다. 그래야 공정한 기록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까? 모두 동일한 속도로 마시다가 마지막까지 버티면 그 사람이 그날의 승자가 됐다.
40대. 나는 이제 술을 즐긴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나는 술을 잘 마신다. 퇴근해서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샤워를 한다. 그리고 아내와 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나서는 책장이었던 술장 앞에서 고민 한다. 오늘은 어떤 술을 마실까?
하루가 평범했다면 글렌피딕 12년이나 발베니 12년 더블우드 같은 데일리로 마시기 편안한 위스키를 선택한다. 때로는 레미 마틴 VSOP나 헤네시 VSOP 같은 꼬냑도 좋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날에는 캐스크 스트랭스가 좋다. 글랜파클라스 105, 글렌알라키 10 CS, 다니엘 부쥬 로얄 같은 55~60도의 위스키나 꼬냑이 좋은 선택이 된다. 약간 출출한 날에는 간단한 음식과 하이볼, 잭콕이 잘 어울린다. 나름 기억할 만한 날에는 글렌알라키 15년, 글렌그란트 15년, 글렌파클라스 15년 같은 내 기준 스페셜한 위스크를 한잔 따른다.
딱 한잔이면 된다. 한잔이면 30~40분가량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거창한 안주도 필요 없다. 한잔의 물이면 된다. 편안하게 빈백에 기대 느긋하게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날을 버텨갈 힘을 받는다. 술을 마시는데 힘들 필요도 없고 숙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취하면 맛을 느낄 수 없다. 먹고 죽지 말자. 딱 한잔을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