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 접어들며 시작된 도둑질은 그칠 줄 몰랐다.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위스키에 입문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위스키 열풍이 불고 있었고 일부 위스키는 구경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맥캘란 12년 셰리, 발베니 12년 더블우드 같은 위스키의 맛이 너무 궁금했다. 틈만 나면 대형마트를 찾았고 위스키 판매점의 공지를 수시로 확인했다. 무심코 찾았던 마트에서 맥캘란 12년 더블우드를 발견하고는 바로 2병을 집었다. 술을 사기 위해 20만 원 넘는 돈을 쓰다니. 손이 떨리고 심장은 쿵쾅거렸지만 호기심을 누를 수는 없었다. 광주 출장 중 발베니 12년 더블우드가 입고 됐다는 판매점의 공지를 보고 매진될까 봐 11시 넘어서 매장을 방문했던 적도 있었고 야마자키 12년을 사기 위해 오픈런도 달려봤다. 지금도 그렇지만 술에 미쳤다.
쌓여가는 위스키. 둘 곳이 마땅치않아 집 구석구석에 쌓여있던 걸 한데 모아봤다. 와! 많다.
그렇게 한 병씩 모으니 어느덧 20병 조금 안되게 병을 오픈했고 박스째 고이 잠들어 있는 아이들이 30병이 조금 안된다. 1년 동안 무지성으로 구입하기 시작한 술들이 이렇게 많다니. 정리하다 놀라고 더 이상 술을 보관할 곳이 없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술이 넘쳐나니 보관할 장소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술을 그만 사면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나의 수집욕은 멈출 수 없었다.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모으는 미련한 짓을 2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다.
서울과 부산을 제외한 곳에서는 위스키를 구입하는 게 조금 어렵다. 특히 인기 있는 제품이나 희귀한 상품들은 더 구하기 어렵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해외직구였다. 택배 수령 주소는 사무실로 정했다. 집에 놔둘 자리도 없거니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사무실에도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으듯 하나씩 늘어갔고 10병이 넘어간다.
이제 나에게 술은 넘쳐난다. 그렇다면 마셔야 할 때다.
퇴근하고 '오늘은 어떤 걸 마시지?' 고민하는 게 하루 일과처럼 됐다. 마시는 횟수가 점점 늘어가고 취기를 느끼며 잠자리에 드는 날이 수두룩해졌다.
3일에 걸쳐 얼음을 얼리고 잭콕을 한잔 말았다. 얼음이 너무 커서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얼음과 콜라, 잭다니엘이 절묘하게 어울리며 아름다운 맛을 선사한다.
하이볼 한잔을 타서 설거지를 하며 마시고 잭콕을 들고 욕조에 들어가 즐겼다. 저녁부터 이어진 술은 잠자리에 들기 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잭다니엘 넘버 7 1리터를 사며 언제 다 마시지 생각했는데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공병은 늘어가고 술장은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사무실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날 책상 위에 둔 위스키를 한 병 오픈했다. 영화에서 보던 돈 많은 사장님이 된 것처럼 위스키를 잔에 따라 홀짝였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라가불린 8년을 그렇게 사무실에서 다 마셔버렸다. 대략 1달쯤 걸렸을까? 20일 동안 700ml의 술을 다 마시려면 하루에 30ml 기준으로 2잔 조금 넘게 마셨다는 계산이 나온다. 2잔이라도 천천히 마시다 보면 얼굴에 변화가 심하지 않았고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적당히 피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이 찾아왔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든 일이 있는 날도 아니었다. 기분 좋게 직장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국밥집을 찾았고 소주 한 병을 시켜 나눠 마셨다. 평소 같으면 낮술을 즐겨하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술이 맛있게 느껴졌다. 맙소사. 소주가 맛있다니! 국밥과의 페어링은 아름다웠다. 뜨거운 국밥 한 숟가락을 먹고 소주를 털어 넣으면 입안이 적정 온다가 된다. 한 숟가락에 한 잔을 털어 넣으니 어느덧 소주병이 비어갔다. 점심시간이었고 오후에 일과를 이어가야 하니 4명이서 2병 정도로 마무리 지었다. 일인당 소주 반 병 정도 마셨는데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셨다면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자리에 돌아와서는 부족한 술을 채우기 위해 라가불린 8년을 꾹꾹 따르고는 홀짝였다. 기분 좋게 쭉쭉 마시고는 그대로 취기에 잠이 들었다. 3시간 정도를 취해서 잠을 자다 이렇게 살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에 이를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늘 말했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술을 마시면 얼마나 마신다고.
나는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니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곤 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나는 술을 좋아했고 술을 마시는데 관대했다. 또한 의지는 약했고 술은 여전히 맛있었다.
병을 한번에 버리는 것이 부끄러워 폐지를 버리며 조금씩 술병을 버렸다. 맥주와 꼬냑, 위스키까지... 다시 봐도 왠지 부끄럽다.
올해 들어 집에 버리지 않고 모아뒀던 술병을 정리했다. 사진으로 미쳐 남기지는 않았지만 13병이었다. 1년 동안 마신 술이 13병이었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용량으로 따지만 9리터가 넘는다. 한 달에 한 병 넘게 위스키를 마셔댔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고 있었지만 '난 술을 별로 안 마셔'라고 하며 자기 위안에 빠져 있었다.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마시는 양이 늘어난다. 누군가는 '술은 마실수록 늘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 간이 망가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한다. 내 몸 또한 알코올을 더 원하니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술을 털어 넣는 것이다. 취기가 올라와야 만족하는 밤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내 몸은 더 망가진다.
언제나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지만 술은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 병에 몇 천만 원짜리를 마셔봐야 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어야 끝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술에는 끝이 없다. 어떤 취미든 끝을 볼 수는 없다. 자기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참 좋다. 그런데 적당히 마시는 것이 쉽지 않다. 취하면 즐겁고, 더 즐겁고 싶어 술을 더 마시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술이 술을 먹고 있는 아주 아찔한 경험을 다들 해보지 않았을까? 절주 하는 방법은 즐주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술의 색과 향, 맛을 충분히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하다 보면 적당히 마시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제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위스키를 즐긴다. 딱 한잔이면 충분하다. 만약 2잔 정도를 마시고 싶을 때는 반잔씩 따라서 즐긴다. 앞서 이야기했었지만 '마시고 죽자'는 사양이다.
절주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술을 즐기고 술의 맛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레 마시는 양이 줄어들 것이다. 모두 '즐술'하며 건강한 음주문화를 이어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