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2018)
여성에 가해지는 사회의 억압과 차별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습니다. 물론 반작용도 상당히 많죠. 물론, 그동안 여성이 차별받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 현상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사람도 과거 여성 차별에 대해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말하죠. 문제는, 지금 여성이 차별받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꽤 많이요. 개중 대다수는 20대 남성입니다.
약 한 달 전에 만난 제 대학 친구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요. 비록 그 친구들도 상당히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지금 차별받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많이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차별을 받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성들이 말하고 있는 정도로 차별받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죠. 요컨대, 지금의 여성 차별은 그리 심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20대 남성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제 친구들이 아예 틀린 말을 한 건 아닙니다. 비록 20대 남성이 여성 혐오의 주축이라는 말은 주류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지만, 그 혐오의 양상이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지요. 예전의 여성 혐오가 그냥 여성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지금의 여성 혐오 양상은 위험한 경쟁자가 생겨났을 때의 그 혐오 양상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정부에서 제도적으로 그들을 지원해주는 것처럼 보이니 20대 남성 입장에서는 여성들이 자기 자리를 빼앗는 것 같겠죠.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사실이지만, 소수자에 대해 가장 공포심을 느끼는 계층은 주류 사회의 하위 계층입니다. 외국에서도 인종차별을 가장 심하게 하는 계층은 사회의 최하층, 이를테면 미국의 레드넥이고, 못 사는 나라일수록 외국인을 싫어하는 양상이 강합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해서이죠.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흑인 배관공들이 입을 댄 컵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흑인을 싫어하니 말이죠. 하지만 그는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기득권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이트에서 주먹 쓰는 일을 하거나, 푸드파이팅 상금을 받거나, 혹은 이탈리안 마피아들이 주는 일거리를 받아먹으며 연명을 하는 전형적인 이탈리아계 하층민이죠. 사회 기득권들에게 모독을 당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글도 제대로 쓸 줄 모릅니다. 편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니 말 다 했죠.
반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돈 셜리는 성공한 소수자입니다. 그는 흑인이지만, 동시에 성공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합니다. 백악관에 초청받아 연주를 한 적도 있죠. 카네기 홀 꼭대기 으리으리한 펜트하우스에 살고, 운전기사를 구하려고 하기도 하죠. 심지어 그는 백인 집사까지 부립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얼핏 기득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몇몇 하층민 백인들은 그를 보면서 흑인 차별이란 없다고 목성을 높일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에서도 백인 하층민 발레롱가가 돈 셜리를 보며 너보다 내가 더 흑인 같다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흑인입니다. 토니 발레롱가는 처음 그의 지시를 노골적으로 무시합니다. 물론, 백인 기득권층이 그를 대우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눈에 그는 그저 흑인에 불과하죠. 이는 화장실과 식당, 그리고 ‘그린 북’이라는 장치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이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는 인종분리가 당연했던 사회였습니다. 유색인종과 백인종이 똑같은 수준의 서비스만 받을 수 있다면, 둘을 분리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죠. 이에 따라, 많은 사업자들이 백인만 쓸 수 있는 화장실, 호텔, 그리고 식당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숙박업소의 경우 이 문제가 심각했는데, 많은 호텔이 흑인 손님을 받지 않았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그린 북’입니다. 남부에서 흑인 손님을 받아주는 호텔을 모은 일종의 여행 가이드 책자인 것이죠.
그런데, 이 그린 북에 나온 호텔 중 대다수는 그다지 좋은 시설을 가진 호텔이 아니었습니다. 작중에선 그린 북이란 소재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실제로도 주인공 일행이 그린 북을 보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그린 북에 실린 대부분의 호텔은 허름한 모텔이었죠. 그뿐인가요? 부유한 백인들은 흑인인 돈 셜리를 정중하게 대하지만, 그가 좋은 백인 시설을 이용하려 할 때마다 허름한 흑인 시설을 이용하라고 재촉합니다.
발레롱가는 이 그린 북에 나온 여관을 통해 처음으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흑인 차별이란 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란 걸 느끼게 되는 것이죠. 발레롱가는 여관에서 나가 린치 당하고 있는 돈 셜리를 구하면서, 그리고 이유 없이 감옥에 갇히는 그를 구하며, 그리고 흑인이란 이유만으로 가게에서 쫓겨나는 그를 보며 인종차별에 서서히 눈을 떠갑니다. 자신이 특권층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마저 차별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말이죠.
이 둘은 이 차별을 겪으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 합니다. 이 둘은 이 방법론의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둘이 추구하는 방향은 같습니다. 이 둘, 그러니까 토니 발레롱가와 돈 셜리 모두 주류 같은 비주류이기 때문입니다. 백인 하류층과 흑인 상류층은 모두 사회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돈 셜리는 고등 교육을 받은 부유층이지만, 여전히 흑인입니다. 발레롱가는 백인이지만 글씨 쓰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하류층이고요. 둘 모두 사회의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이 둘은 결국 같은 방법으로 사회에 맞서 싸웁니다.
이 둘이 함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은 지금의 20대 남성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사실 20대 남성은 강자라고 하긴 힘든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청년 실업률, 청년 빈곤율 등의 지표가 나타내듯이 현재 20대 남성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동안 국가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죠. 이번 정부에선 그나마 이들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이 문제는 이번 정부 내에 해결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하지만, 그 끝이 사회가 아닌 다른 약자들을 향해선 안 됩니다. 취업이 힘든 것, 군대에 억지로 보내는 것, 그리고 사지로 몰아놓은 것은 기득권이 만들어놓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20대 남성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는 결국 사회가 만들어낸 문제이며, 이를 바꾸기 위해선 사회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마치 흑인을 차별하는 남부에 가서 순회공연을 여는 돈 셜리처럼 말입니다.
현재 사회는 흑인과 이탈리아계 백인 하류층을 차별하던 60년대 미국 사회와 비슷합니다. 20대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고 멸시하며 그들의 어려움에는 관심도 없지요. 게다가, 이 두 계층이 서로를 탐탁잖게 생각한다는 것 역시 닮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탈리아계 백인들이 흑인을 탐탁잖게 생각하는 것이지만요. 발레롱가의 친구들이 돈 셜리를 깜둥이라 비하하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지만 발레롱가와 돈 셜리는 이런 사회적 장애물을 극복하고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며, 나아가 인종차별을 극복하려 노력합니다.
이 영화는 이 점에서 가치 있는 영화입니다. 비록 이 영화가 60년대 미국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양상은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또한 그 해결책 역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약자들 간의 연대와 이해 말이지요.
마지막 장면에서, 이 영화는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케네디 형제, 보안관, 그리고 돈 셜리를 환영하는 이탈리아인 친구들을 통해 말이죠. 비록 한 순간에 세상이 바뀔 정도는 아니었지만, 돈 셜리와 발레롱가의 이해는 결국 사회를 바꿀 첫 균열을 만들어냈습니다. 만약 우리가 토니 발레롱가와 돈 셜리처럼 서로 이해하고 극복해나간다면, 20대 남성과 여성 모두 더 나은 사회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약 20년 뒤, 그러니까 1980년대의 나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히든 피겨스도 이 영화와 비슷한 주제를 다룹니다. 인종차별 말이죠. 물론 히든 피겨스도 상당히 잘 만들어진 영화지만, 이 영화는 히든 피겨스에 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히든 피겨스에서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 중 하나는 약자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작중 주인공들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는 백인 기득권을 대표하는 국장 알 헤리슨(케빈 코스트너)이 해결해주죠. 이는 상당히 고전적인 기법이지만, 동시에 약자는 기득권이 인정해줘야만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 역시 남긴다는 한계점도 있죠.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기도 하고요. 물론 작중 배경상 어쩔 수 없지만요.
하지만, 그린 북은 약자 둘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실 작중에서 그들을 인정해주는 기득권은 거의 없다시피 하죠. 그럼에도 이 둘은 사회에 균열을 내고, 진보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주체적으로 문제를 극복해나간다는 점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요.
게다가 이 영화는 당시 미국을 정말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흑인에 대한 편견 중 하나가 뭐냐면, 흑인들은 소울 푸드, 즉 치킨, 수박을 좋아한다는 건데, 이 부분도 놓치지 않고 잘 캐치했고요, 당시 생활상 역시 상당히 잘 재현해냈어요. 국도 휴게소나 보안관, 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던 흑인들, 도시 뒷골목에서 놀던 이탈리아인들, 그리고 남부의 인종 분포까지. 마치 그 시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더라고요.
작중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도 마음에 들었어요. 보통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중 대부분은 갈등의 대상을 반공주의 삼류 만화에 나오는 악당처럼 묘사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인종차별에 찌든 경찰관은 그 시대의 남부 경찰관처럼, 인종차별주의자 부유층 백인은 정말 부유층처럼 행동하도록 각본을 짰더라고요. 보통 한 인물의 신념이나 사악함은 특정한 환경에서 보이고, 그 환경이 아닐 땐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감독은 이 점을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위화감이 전혀 들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에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