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드디어 아이작 뉴턴의 시간이 왔습니다. 과학의 역사는 깁니다. 그 긴 역사 안에 수많은 천재가 있죠. 그러나 그중에서도 두 명만 꼽는다면 꼭 들어가는 인물이 뉴턴과 아인슈타인이죠. 여러분도 학생인 입장에서 창의성에 대해서 관심이 많지요? 그래서 두 인물의 창의성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뉴턴을 나중에는 아인슈타인을. 어떻게 그런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시죠. 같이 보고 배워봅시다 ^^
뉴턴의 위대함에 대하서는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뉴턴이 죽자 당대의 유명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헌시를 보냅니다.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도다. 주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도다.
과학자 중에 이런 정도의 칭송을 받은 인물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으로써의 뉴턴의 성격을 한마디로 묘사하자면 ‘괴팍한’ 사람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뉴턴은 뭔가 비밀스럽고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뭔가 좀 이상한데 머리는 좋은 천재의 전형이었죠. 그의 이런 성격은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일 겁니다. 그는 1642년 영국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유복자란 아버지 없는 자식을 뜻하는 말이죠. 뉴턴은 상황이 더 나빴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뉴턴이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는데, 뉴턴의 어머니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출산 후 바로 어머니를 재혼시킵니다. 그런데 재혼하면서 아이를 놔두고 혼자 시집을 갑니다. 참 안타까운 일인데 그렇게 뉴턴은 부모 없이 고아처럼 남겨지죠. 그래서 할머니가 뉴턴을 맡는데, 이 분도 제대로 케어를 안 합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아동학대죠. 학비를 안 대줘서 학교에도 못 가고 넓은 저택에 아이 혼자 있는 거예요. 뉴턴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 할 게 없어서 혼자 책 읽으면서 공부했다고 하죠. 그러나 이 아이의 천재성을 알아본 스승들의 도움으로 가정교사 같은 걸 하면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죠.
이후에도 개인으로서 뉴턴의 인생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는데 더 나아가 자신이 동정이란 사실을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건 중세의 연금술사 전통과 관련이 있는 건데, 요즘 그런 인터넷 밈 같은 게 있더라고요. 몇 살까지 동정을 지키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 농담 소재입니다만 실제로 있던 전통입니다. 여담이지만 뉴턴은 본인이 과학자라기보다는 연금술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리학 연구보다 연금술 연구를 더 많이 했을 정도죠.
어쨌든 뉴턴은 평생 홀로 친구도 별로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걸핏하면 부딪쳤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가차 없이 응징했습니다. 그런 그의 성격 중에서도 삶을 더 강퍅하게 만들고 숫한 문제를 일으킨 것은 뉴턴의 숨김 강박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다른 사람이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는데 그래서 자기가 쓴 글을 발표하지 않고 숨기기 일쑤였습니다. 그의 이런 성향이 큰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그것이 “미분”을 누가 먼저 발견했나를 놓고 벌어진 논란입니다. 이 사건은 영국과 독일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서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죠. 미분은 정말 중요한 수학적 기법입니다. 미분이 없다면 뉴턴 역학은 불가능하죠. 뉴턴은 이 중요한 방법을 알아냈는데 발표하지 않고 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라는 독일 과학자가(이 분도 엄청난 분이죠) 먼저 발표를 합니다. 뉴턴은 화가 나서 자신이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에서는 먼저 발표된 논문에 우선권을 주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러자 영국왕립과학학회 회장이었던 뉴턴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우선권을 주장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국과 독일의 과학계 전체의 충돌로 확대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만 이후 연구자들의 면밀한 검토에 따르면 뉴턴이 먼저 발견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거의 10년 정도 앞섰습니다. 만약 뉴턴이 이 연구를 발표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었던 거죠. 그의 이런 습관 때문에 뉴턴이 쓴 대부분의 문헌은 미발표 상태로 있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하나둘씩 발표되고 있습니다. 과학계로써는 큰 손실이죠.
아무튼 뉴턴은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뉴턴의 가장 중요한 업적인 <프린키피아>에도 흥미로운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프린키피아>가 무엇인지, 어떤 책인지 살펴봐야 되겠죠. 이 책의 정식 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입니다. 너무 길기 때문에 한 단어만 따서 보통 프린키피아라고 부르죠. 이것은 진정으로 세계를 바꿔놓은 책입니다. 이 책은 현대 과학의 시작점이고, 이후 과학은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실 이 책도 뉴턴의 서재 속에 묻혀있을 뻔했습니다.
발단은 나중에 뉴턴의 절친이 되는 에드먼드 헬리와의 대화였습니다. 당시 뉴턴은 은둔 중이었는데, 학계의 중심인물 었던 로버트 훅이 자기 이론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가 동료들이 호응해주지 않자(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10년 넘게 은둔한 겁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아마 두 분이 술 한잔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헬리가 자기가 요즘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면서 말을 꺼냅니다. 당시 과학자들 사이에는 어려운 문제를 놓고 답을 맞히는 내기가 유행했는데, 헬리도 그런 내기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내기에 걸린 문제는 행성의 궤도 문제였습니다. 앞서 우리는 케플러가 행성 궤도가 타원이란 사실을 발견한 과정을 보았죠? 이 사실이 밝혀진 지 시간이 상당히 흘렀지만 정확한 이유는 여전히 밝혀 지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헬리는 어렴풋이 행성의 인력이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면 설명될 것이란 아이디어를 품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계산을 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문제를 뉴턴에게 묻자 뉴턴은 바로 계산 결과가 “타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헬리가 깜짝 놀라서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뉴턴은 오래전에 계산해 두었다고 답했습니다. 헬리는 마음이 급해졌나 봐요. 당장 집에 가서 그 계산 결과를 자기에게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뉴턴의 집으로 갔는데 아무리 뒤져도 계산해 놓은 게 안 나옵니다. 그래서 뉴턴이 다시 계산해서 일주일 내로 보내주기로 하고 헬리는 돌아갑니다. 그 편지는 거의 일 년이 지난 뒤에 헬리에게 옵니다.
자, 그런데, 이 부분은 여담입니다. 바쁜 분은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여기서 살짝 의심이 드는 부분이 1년이 걸렸다는 부분입니다. 뉴턴이 정말 이 시점에 이 문제를 풀어두었을까요? 그랬다면 왜 1년이나 걸렸을까요? 왜냐하면 뉴턴은 흔히 말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뭐든지 한번 보면 다 기억하는 천재들이죠. 뉴턴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뉴턴의 집에 불이 나서 100권도 넘는 책이 타버린 적이 있습니다. 뉴턴은 고작 두 달 만에 그 책들을 전부 다시 쓰지요. 머릿속에 책이 모두 들어있으니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걸린 걸 보면 후배였던 헬리에게 약간 과장 섞인 허세를 내보이지는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이건 농담입니다 ^^
어쨌든 문제를 증명한 편지를 본 헬리는 깜짝 놀랍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연구이니 당장 출판해야 한다고 뉴턴을 설득하죠. 뉴턴은 돈이 없다고 하며 미적거립니다. 헬리는 내가 모든 비용을 낼 테니 당장 책으로 만들어서 출판해야 한다고 뉴턴을 다그칩니다. 이렇게 해서 과학을 영원히 바꾸게 되는 위대한 책 <프린키피아>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헬리와의 우연한 만남이 아니었으면 뉴턴의 성향상 이 책도 서재에 묻혀있다가 몇 백 년 뒤에나 발견되었을 확률이 높았죠. 좋은 친구를 두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