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진권 Mar 31. 2021

과학혁명 3: 티코 브라헤와 케플러

자, 여러분 지난 시간 우리는 코페르니쿠스가 과학 혁명의 막을 어떻게 열었는지 살펴봤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 시작점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몰고 간 두 천재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두 명의 천재는 티코 브라헤(1546~1601)와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입니다. 비유하자면, 티코는 관찰의 천재라고 할 수 있고 케플러는 수학의 천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천재의 만남은 길지 않았지만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습니다. 만약 둘이 만나지 못했다면 과학의 발전은 수 십 년은 지체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세상을 바꿔 놓은 엄청난 발견의 과정을 찬찬히 살펴봅시다.


그림 1. 티코 브라헤의 초상


티코 브라헤(Tycho Brahe)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과학자인데도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아쉬운 인물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분의 업적이 주로 실험 물리학에 해당하는 작업이고, 그것이 이론 물리를 중시하는 한국의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험 또한 이론 못지않은 중요한 작업이지요. 과학은 사실 실험과 이론, 두 개의 심장으로 달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티코와 케플러의 공동 작업이 그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티코는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덴마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에 부모는 어떻게든 티코에게 가업을 잇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을 다니던 중에 그는 우연히 일식을 목격하게 됩니다. 아마 그 사건이 이 젊은이의 마음에 깊이 각인된 모양입니다. 이후 티코는 전도유망한 장래를 버리고 천문학자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부모님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티코 브라헤를 위대한 과학자로 만들어 준 것은 그의 전설적인 ‘시력’이었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1킬로미터 밖에 있는 동전이 얼마짜리인지 맞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티코의 시력은 대단했습니다. 그가 남긴 천체 기록을 검토한 결과 그의 시력이 3.0~5.0에 해당한다는 연구가 있을 정도입니다. 티코는 뛰어난 시력을 천체 관측에 십분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타고난 재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닙니다. 티코는 뛰어난 도구 제작자였고 많은 관측 도구들을 개발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6m에 달하는 거대한 사분의(quadrant)입니다. 사분의란 원을 1/4 등분한 형태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두 개의 관측 구멍으로 별과 기구의 방향을 맞추면 눈금으로 별의 각도를 잴 수 있는 도구입니다. 기구를 크게 만든 이유는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뛰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유명한 천문학자가 된 티코는 우연한 기회에 덴마크 왕 프레데릭 2세의 눈에 들게 됩니다. 왕은 통 크게 작은 섬 하나를 주고 그곳에서 연구를 하도록 지원해주었습니다. 티코는 섬에 성을 짓고 ‘우라니보그(Uraniborg)’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번역하면 ‘하늘의 성’이라는 뜻입니다. 우라니보그는 과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데 그것이 최초의 근대적인 과학연구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라니보그는 전체가 온전히 과학을 위해 지어진 성이었습니다. 성의 상층부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도구들이 놓였고 하층에는 연금술 연구를 위한 설비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티코는 낮에는 연금술을 밤에는 천체 관측을 하며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그림 2. 우라니보그의 상상도. 티코 옆의 거대한 벽면 사분의가 눈의 띈다. 각 층마다 연구원들이 다른 연구를 하고 있다.


이렇게 불멸의 업적을 위한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우리니보그에서 티코는 역사 상 그 어떤 것보다 정확한 관측 기록을 만들어 냅니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까지 모든 천문 관측은 맨 눈으로 이뤄졌습니다. 티코의 자료는 지금도 맨 눈으로 관측한 것 중 최고의 기록입니다. 그의 정밀 관측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그런 기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정확성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가장 뛰어난 기록의 오차는 25초 정도라고 합니다. 원을 360 등분한 것이 1도입니다. 1도를 다시 60 등분한 것을 1분이라고 하고, 1분을 다시 60 등분하면 1초가 됩니다. 계산해보면 25초는 약 0.07도 정도가 됩니다. 평균 오차는 4분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정확도입니다. 인간 시력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죠. 티코가 남긴 기록은 그 이전의 어떤 관측 기록보다도 3배 이상 정확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을 통해 역사상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지요.


여기서 정확도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정도의 정확도가 없었다면 케플러의 발견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행성 궤도는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고 했죠. 그런데 그 찌그러진 정도(이심률)가 아주 작습니다. 그 정도는 비율로 약 0.4%에 불과합니다. 이전 기록의 정확도로는 이 차이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만약 티코의 정확성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면 케플러가 궤도의 진실을 밝힐 수 없었을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1600년으로 가봅시다. 티코는 계속해서 방대한 관측자료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관측하는데 바빠 자료를 정리할 여력이 없었지요. 그래서 정리를 도와줄 조수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케플러를 만나게 되지요. 제가 ‘운명’을 언급한 이유는 그 과정에 참 사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림 3. 케플러의 초상.

요하네스 케플러는 티코와 달리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케플러가 5살 무렵 돈을 벌기 위해 용병으로 떠났고 이후 그를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세는 기울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밤에 즐겨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별을 관찰하며 어린 케플러에게 천문학의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케플러는 튀빙겐 대학교로 진학하게 됩니다. 여기서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을 만나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배우게 됩니다. 이후 그는 <우주 구조의 신비>라는 지동설을 지지하는 책을 쓰게 되는데 이 책이 나중에 티코와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졸업 후 케플러는 그라츠라는 도시의 수학 교사가 됩니다. 그러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점치는 달력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케플러는 점성술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종교 전쟁의 여파가 그가 살던 도시에도 미친 것입니다. 루터파였던 케플러는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했고 결국 거의 맨몸으로 추방됩니다. 정말 암울한 상황이었지요. 정처 없이 떠돌던 그에게 티코 브라헤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평소 티코는 케플러의 수학적 재능을 높이 샀는데, 마침 케플러가 일자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수로 초청하게 됩니다. 케플러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와 같이 일할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을 겁니다.


하지만 운명은 야속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만난 지 일 년도 안돼서 과음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티코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여러분 지나친 음주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저는 티코가 오래 살았다면 두 천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룩했을지 상상해보고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지요. 티코는 자료를 케플러에게 맡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티코의 죽음은 평생 운이 없었던 케플러를 다시 고난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정부는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자금을 약속했지만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빚은 쌓여만 갔고, 티코의 유가족들은 자료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케플러가 티코에게 자료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욕심이 나서 도둑질을 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마음대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을 겁니다. 케플러의 마음이 어땠을지 감히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평생 꿈꿨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가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위대한 과학자는 방에 틀어박혀 자기 만의 일에 몰두했습니다. 남아 있는 자료들로 케플러의 연구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작업은 티코가 남긴 관측 자료 속에서 별의 운행을 좌우하는 법칙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단서가 없었으므로 가능한 식을 일단 세우고 계산해서 확인해야 했습니다. 모든 자료는 숫자의 연쇄에 불과합니다. 그 방대한 숫자 뭉텅이 속에서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규칙을 찾는 작업이었습니다. 컴퓨터가 개발되기 훨씬 전이므로 모든 계산을 손으로 직접 해야 했습니다. 남아있는 A4 용지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수기 계산 자료들은 그의 영웅적인 노력을 증명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을지! 그렇게 수년을 매일 케플러는 미친 듯이 계산에 몰두했습니다. 만약 저였다면 곧 미쳐버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구원의 순간이 왔습니다. 화성 궤도를 계산하다가 케플러는 티코의 자료와 원 궤도가 8분(8/60도) 정도 어긋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작은 차이였기 때문에 보통의 천문학자라면 관측 오차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케플러는 티코의 관측을 믿었습니다. 그는 티코가 그렇게 많이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자료를 더욱더 깊이 파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케플러 2법칙으로 불리는 규칙을 발견합니다.


그림 4. 케플러의 제2법칙. 행성은 같은 시간 동안 동일한 면적을 그리며 이동한다.


제2 법칙은 행성과 태양을 연결한 선이 같은 시간 동안 지나는 면적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법칙은 일정 면적의 법칙으로 불립니다. 그러나 케플러는 다시 고민에 빠집니다. 그것은 단지 수학적 관계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물리적인 의미입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관계를 찾기는 했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시 연구에 매진한 케플러는 이듬해 이 관계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냅니다. 면적이 일정한 이유는 행성이 태양에 가까우면 속도가 빨라지고 멀어지면 느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행성과 태양의 거리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거리가 같지 않다. 즉, 그것은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케플러의 제1법칙으로 부르는 법칙입니다.


제1법칙 :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며 공전한다.


앞서 우리는 인류가 수 만년 전부터 하늘을 관찰한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 모든 기간 우리는 행성의 궤도가 원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드디어 케플러에 의해 깨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발견은 과학의 경이로운 하나의 전환점이 됩니다. 우주는 그때까지 생각했던 그 우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발견을 해냈지만 케플러의 인생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그는 가난했으며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케플러가 누구보다 사랑한 어머니는 마녀로 몰려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무죄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고된 수형생활로 인해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케플러 본인도 밀린 연구비를 받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가 병을 얻어 사망합니다. 그래서 케플러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케플러는 연구를 놓지 않았습니다. 말년에 그가 남긴 천체의 위치를 기록한 ‘루돌프 표(Rudolphine Table)’는 티코의 작업을 정리한 것으로 당시 가장 정확한 별과 행성의 기록이었습니다. 그것이 명나라에 전해져서 시헌력의 기반이 되었고 조선까지 전해져 지금도 어르신들이 쓰는 음력이 되었습니다. 케플러의 손길은 한국까지도 미쳤습니다.



아마도 케플러는 가장 불행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을 겁니다. 저는 가끔 무엇이 그를 지탱해 주었을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가 지금의 과학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Naturally Obsessed: The Making of a Scientist”라는 다큐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일상을 촬영한 영상인데, 여기 나오는 과학자들도 ‘내가 다른 데서 이렇게 열심히 일했으면 연봉이 20배는 되었을 거야’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를 나눕니다. 말하자면 과학자는 열심히 일하지만 경제적 보상은 형편없습니다. 그럼에도 과학자로 하여금 연구를 붙잡게 하는 동인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어떤 ‘발견의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케플러는 타원 궤도를 발견한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마치 내가 잠에서 깨어나고, 새로운 빛이 내게 비추는 것 같았다”


앞서 언급한 다큐에서도 주인공은 AMPK라는 단백질의 구조를 발견하고 “세상에서 이것을 아는 사람이 나 혼자인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마약보다 더 강한 황홀감일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는 비슷한 느낌이 케플러와 다른 많은 과학자들을 움직이는 동인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아마 그 느낌을 경험한 것으로도 보상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인생에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분에게도 언젠가는 케플러처럼 구원의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노력하면 그런 순간이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자, 그렇게 해서 티코와 케플러의 공동 작업은 인류에게 새로운 빛을 비추어 주었고 잠에서 깨어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발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발견이 아직 “경험 법칙”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당시로써는 케플러의 법칙은 관찰 자료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케플러는 그것이 왜 성립하는지, 그것의 원리가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이론”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론의 탄생은 희대의 천재 아이작 뉴턴의 탄생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전에 또 한 명의 위대한 징검다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업적을 살펴봐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위대한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지요 ^^



*그림 출처

그림1: https://ko.wikipedia.org/wiki/튀코_브라헤#/media/파일:Tycho_Brahe.JPG

그림2: https://www.krpia.co.kr/viewer/open?plctId=PLCT00005130&nodeId=NODE04213625

그림3: https://ko.wikipedia.org/wiki/요하네스_케플러#/media/파일:JKepler.png

그림4: https://ko.wikipedia.org/wiki/케플러의_행성운동법칙#/media/파일:Kepler-second-law.sv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