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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사람 Jan 04. 2021

동시대의 보는 방식

보는 방식과 이미지에 대하여

보는 행위는 객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며,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것을 본다. 보는 것은 외부의 시각적 입력을 뇌가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사물을 바라보더라도 시대정신과 세대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학습받은 문화와 교육,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서 서로 다른 것을 본다. 보는 것은 선택 행위다. 우리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것은 다시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며 또다시 우리의 보는 방식이 바뀌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에 영향을 받는다"
                            -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p10


이미지는 그 보는 방식의 결과물이자 기록이다. 이미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재창조되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래서 이미지는 객관적인 시각정보가 아니다. 이미지는 언어다. 이미지에는 다층적 범위의 코드가 내장되어있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이미지들을 살펴보면, 그 이미지에 나타난 보는 방식이 드러나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사고방식을 가늠해볼 수 있다.


보는 방식과 이미지에는 역사가 담겨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과거 우리는 어떠한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했을까, 그렇다면 동시대에는 그 방식은 어떻게 변화했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과거의 보는 방식: 선형 원근법


회화나 벽화 등 서양 역사에 남은 이미지에 비추어볼 때 그들은 오랫동안 선형 원근법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서양 회화는 대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지도록 발전했다. 그러나 선형 원근법이라는 보는 방식과 관점은 그 특성상 중심주의, 우월주의적 사고방식 또한 내포한다. 이는 하나의 고정된 우월한 관찰자를 상정한다, 그래서 대상을 바라보는 다층적 시각을 소거하고 오직 하나의 지배적 관점만 남긴다. 이 보는 방식은 서구의 정복, 지배, 식민지주의. 인종 우월주의, 서양의 종교에서 비롯된 인간 중심주의 등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스 프레데만 드 프리스(Hans Vredeman de Vires), <원근법 연구 39(Perspective 39)>, 1605.


원근법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이고 그렇게 여겨져 왔다. 하지만 실제로 원근법은 객관적 사실을 나타내지 못한다. 가령 원근법은 양안 시차를 담아내지 못한다. 다른 관점이 사라지고 단안의 관점, 이상적인 하나의 관점만 남긴다. 선형 원근법은 지표면의 만곡도 무시한다. 현실이 아닌 이상적인 세계관을 가정한다.


선형 원근법은 이분법적이고 단선론적 역사관을 상징한다. 그것은 기술과 사회의 발전이 단 하나의 선형의 경로만이 있으며, 그것에 앞서있는 자는 우월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렇게 과거 근대의 보는 방식은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나누고 분류하여 속단했다. 선형 원근법은 고대뿐만 아니라 근대성을 상징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다소 폭력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선형 원근법의 지위는 근대 이후 많이 흔들렸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그렇게만 바라보지 않는다. 20세기는 선형 원근법적 보는 방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체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다, 회화는 재현에서 벗어났고, 시공간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항공, 우주 기술의 발달로 고정된 하나의 시점이 아닌 다양한 관점 허공의 시점 또한 등장한다.


동시대의 보는 방식: 수직 원근법


그렇다면 동시대를 지배하는 보는 방식은 무엇일까. 히토 슈타이얼은 동시대의 보는 방식이 수직 원근법에 기반해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이 세상은 더 이상 단 하나의 관점과 이론 그리고 아이디어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무언가를 관통하는 근본이 사라진 상태이다. 바닥이 사라진 우리는 자유 낙하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형 원근법의 고정된 관찰자 시점이 아닌, 마치 자유낙하 중인 공중에 부유하는 관찰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슈타이얼이 말한 수직 원근법적 보는 방식이다. 이분법적 사유에서 벗어나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그것을 드러낸다. 과거의 근대적 보는 방식은 근거 없음/근본 없음/바닥 없음이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발판 삼아 그 방식이 파괴되고 있다. 가령 동시대에 우리는 비정상적 권력 불균형에 의한 보는 방식 (가령 젠더적, 서구 제국주의적, 이념적, 신 자유주의적 시각과 사고방식 따위)에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선형 원근법이 고정된 상상의 관찰자를 상정하여 문제를 내포했듯이, 수직 원근법도 자체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이 보는 방식이 우리를 또 다른 폭력적 사고방식으로 안내할 수 있다고 슈타이얼은 경고한다. 동시대에 우리는 부유하는 카메라의 시점에 많이 노출된다. 이것은 새로운 수직성의 권력 불균형을 야기할 수 있다. 군사 위성, 구글 위성지도, CCTV가 포착하는 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것은 우월한 관람자를 위한 오버뷰와 감시의 관점을 창조한다. SNS의 뉴스피드 또한 마찬가지다. 무심히 스크롤되어 올라가는 인스타그램 피드의 사진들은 마치 감시자가 허공에 부유하며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동시대의 보는 방식은 부유하는 시점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에 노출되는 방식이다.


부유하는 인스타그램 피드 (이미지 출처 : https://www.affarit.com/how-to-organize-your-instagram-feed/)


그 부유하는 관점, 수직 원근법에 의해 보이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일까? 과거의 이미지는 적어도 우리가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면, 동시대에는 소프트웨어, 인공지능, 데이터 과학 등의 기술 발달로 그 이미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알고리즘이 대신 선택해준다.



동시대의 이미지들


동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이미지에 노출되며, 그것이 우리의 보는 방식(사고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다음은 내가 수집해본 것들이다.


알고리즘 큐레이팅 이미지


스마트폰 탄생 이후 동시대 이미지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 번째는 우리는 점점 더 쏟아지는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산다. 그 대부분의 이미지를 주로 크고 작은 스크린을 통해 접한다. 그래서 역사상 전례 없이 수많은 이미지들에 노출되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동시대에 접하는 이미지의 대다수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알고리즘이 대신 선택해준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정확하게는 기업의 수익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은 점차 우리의 보는 방식과 사고방식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알고리즘의 작동원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사용자를 최대한 오래 붙들고 있기". 그러한 원칙은 간단하지만 파괴적이어서 우리를 쉽게 지배했다(AI는 이미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이미지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알고리즘에 의해 더 노출되고 강화된 생각들이 선택한다. 이렇게 자주 노출된 이미지들이 우리 시대의 사고방식을 결정한다면, 동시대의 우리의 사고방식은 기업이 이익에 따라 결정되는 셈이다. 세 번째로 이미지는 함께 보는 방식에서 혼자 보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알고리즘이 구성한 뉴스 피드와 노출되는 이미지들은 개인화되었다. 개인화된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은 쉽게 극단에 치달을 수 있게 되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한 이미지들, 오래 체류한 이미지들은 머신러닝 알고리즘에 의해 학습되어 더 많이, 더 자주 우리의 눈앞에 배달된다. 스마트폰 탄생 이후 10여 년 사이, 트럼프의 탄생과 브렉시트, 태극기 집회 등 우리 시대의 극단주의적 사고방식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업의 알고리즘일 것이다.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


책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에서 저자 정지우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동시대에 우리가 가장 많이 노출되는 이미지는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라는 것이다. 소셜미디어(특히 인스타그램)에는 잘생기고, 이쁘고, 똑똑하고, 잘 나가고, 잘 놀며, 힙한 사람들만 존재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끊임없이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들에 노출된다. 그 이유는 소셜미디어의 사용 목적이 한 사람의 어떠한 정점이 전시되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환각적 이미지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우리 스스로도 그러한 이미지에 속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우울한 삶을 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타자의 삶의 정점이 전시된 이미지에 이렇게 많이 노출된 시대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에 많이 노출된다는 뜻은, 우리의 "보는 방식", 즉 동시대인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미다.


빈곤한 이미지 (Poor Image)


이미지에는 계급이 있다. 히토 슈타이얼은 그 계급 중에 최 하층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Poor Image(빈곤한 이미지)라고 표현했다. 빈곤한 이미지는 우리가 동시대에 많이 접할 수 있는 이미지의 특징이다. 그 이미지들은 주로 디지털 시대에 복제 및 재배포되며, 환영받지 못하고 추방되어 잔해처럼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다. 복사되는 과정에서 해상도가 열화 되고 감성보다는 정보가 남는다.


한편 최근에 새로운 종류의 빈곤한 이미지들이 인스타그램에서 공유되고 있다, 그러한 이미지들이 또 다른 힙한 감수성의 향유 방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인스타그램에서 전통적(?)으로 세련되고 이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상위 계급이라고 했을 때, 이미지 계급의 위계에서 하층에 위치한 이미지들을 향유하는 것이 최근 새로운 *캠프적 감수성과 취향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주로 키치한 오브제가 포착되어있거나, 색이 바래 있거나 빛 번짐이 있고, 우스꽝스러우며, 때로는 난해하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대상이 담겨있으며, 초점이 의도적으로 안 맞거나, 부자연스럽게 플래시가 터져있기도 하다. 주로 젊은 예술가들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본 것 같다.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들에 대한 피로감을 진작에 포착한 예술가들의 하나의 대응방식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캠프가 버려진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재치 있게 향유하는 비예술 취향이라면, 그러한 이미지들이 이미지 계급 내에서 새로운 캠프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References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자유낙하: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 (스크린의 추방자들, 히토 슈타이얼)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스크린의 추방자들, 히토 슈타이얼)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정지우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캐스 선스타인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


* 캠프적인 것의 특징 (from 해석에 반대한다)


탐미주의의 한 양식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스타일을 강조

형편없는 예술이거나 키치 예술

인위적인 요소가 넘쳐남

스스로 캠프라고 생각하지 않음, 의도적이지 않음

열정적으로 과장됨

벗어난 것

제 상태가 아닌 물건을 선호하는 것

무절제

무언가 터무니없음

엄숙한 것

그리고 엄숙함을 폐위시키는 것

하찮은 것에 진지한 것

경건한 것을 사소하게 여기는 것

너무 지나친 진지함

무언가 놀라운 것을 하려는 시도

실패한 엄숙함

연극적으로 과장된 경험의 감수성

희귀성으로 매겨지지 않는 캠프적 가치(감정가)

천박함을 높히 사는 것 (반면 구식 멋쟁이는 천박함을 혐오)

판단 방식이 아닌 일종의 느끼기 방식

열정적인 실패에서 성공을 찾아내는 것

현대 문명에서 버려진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재치 있게 향유하는 비예술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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