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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사람 Jul 09. 2022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사진의 이해를 읽고

<사진의 이해>는 존 버거가 사진에 대해 남긴 에세이를 엮은 책이다. 글을 통해 사진이 무엇인지 그만의 관점으로 재정의 하고, 그것이 개인과 사회와 매개하는 방식에 대해 그 만의 통찰을 남겼다. 사진이라는 매체만큼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의 간극이 큰 매체도 없을 것이다. 명확히 보이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 책을 통해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을 전개시켜볼 수 있었다. 또한 사진이라는 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진과 예술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은 것 같다. 그에 대해 생각해본 것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보려 한다.


사진은 단순히 기억의 보조 기록장치로 사용될 수 도 있고, 성취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운 순간을 간직하기 위함이 될 수도 있으며, 어떠한 주장과 설득을 하기 위함이 될 수도 있다. 소셜미디어가 이미지를 위한 플랫폼화 되면서 사진은 또 개인을 나타내고 이미지를 전시하는 표현 수단 자체로 활용될 수도 있다. 사진은 또한 권력을 쟁취하거나 공고히 다지는 데 사용할 수 있고, 정치가나 기업이 대중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선전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진은 과학연구를 위해 사용될 수 있고, 그 자체로 순수 예술이 될 수 있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사진은 그것을 관람한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더 많은 것을 본다. 우리는 사진을 볼 때, 사진 속에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 부재하는 것도 본다. 의미는 관람자가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의 관계를 연결 짓는 과정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사진에 물리적으로 표현된 외양 외에,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사진은 명확한 것 같지만 모호하다. 사진이 모호하기 때문에 그 의미는 사진이 놓인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모호한 것은 관람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은 정치적일 수 있고 지극히 개인적 일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사진은 절대로 객관적일 수 없는 것 같다. 사진은 맥락 속에 놓이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진을 보았을 때 거기서 의미를 발견했다면 그 의미는 누군가의 의도된 맥락 속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고, 순수하게 개인적 삶의 맥락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한편 사진이 다른 시각 예술(회화)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사진은 다른 시각 작품에 비해서 작가의 의도를 담을 여지가 적다. 촬영자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어떤 것을 어떤 순간에 찍을 것인지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과 회화는 모두 모호하다. 그 모호함은 모두 정보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정보 부재의 원인은 서로 다르다. 회화의 모호성은 작가의 의도에 기반에 있는 반면(회와의 모호성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사진의 모호성은 작가의 의도뿐만 아니라 불연속적 시간성에 기반해있다. 사진은 어떠한 연속적인 상황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이기 때문이다(p78). 작가가 촬영의 순간을 포착한 이유와 맥락을, 관람자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한편으로 사진의 맥락에 기반한 독특한 모호성 때문에 대단히 취약하기도 하다. 사진에 맥락이 부여되면 그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제삼자가 의도된 맥락을 부여하여 다른 목적으로 이용할 위험성에 놓여있기도 하다.


사진은 결국 사진가의 결정이다. 저자가 설명한 것처럼 그 결정에 대한 설득과 설명이 존재한다면 사진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단순한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 기록이다. 여기서 설명의 방식이 굳이 문자에 기반한 설명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너무 텍스트에 기반한 부연설명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것 같다. 문자에 기반하지 않은 설명의 예는 사진집이다. 일련의 사진이 나열된 사진집이나 하나의 사진이 전시된 위치 등 그 맥락이 하나의 설명방식이 될 수 있다. 사진이건 미술작품이건 작품을 관람하면서 혹은 추가적인 정보와 맥락을 접하면서 그 모호함이 점차 사라지고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의 관계가 뚜렷해질 때, 즉 의미가 발견될 때 우리는 어떠한 쾌감을 느낀다. 좋은 예술은 우리에게 흔적을 남긴다. 외양적으로 멋지고 아름다워서 보는 즉시 어떠한 감탄사를 내뱉게 되는 사진보다는 모호한 사진, 그리고 관람자가 작품을 시간을 들여 관람한 이후에야 비로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고, 어떠한 감정을 경험(고무되거나, 불편하거나)할 수 있는 사진이 더 예술성이 높은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에 소개된 아흘람 시블리의 <정찰병>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그의 사진은 사진에 존재하는 것 이면에 부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살펴보게 한다. 작가의 사진에서 표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팔레스타인과 대치하는 이스라엘 군인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작가가 촬영하는 대상은 단순한 이스라엘 군인이 아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인(베두인족)이지만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는 군인들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작가 또한 베두인족이었다. 그래서 작가가 촬영한 사진 속의 대상이 작가에게 적이자 배신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들이 처한 현실을 응시할 뿐이다. 배신자라고 납작하게 낙인 된 그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에게도 삶이 있고, 사연이 있고, 사랑이 있고, 고통이 있다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내게 어떠한 깊은 흔적이 새겨졌다.


이 시대의 사진들은 점차 납작해진다. 보이는 것에서 멈춘다. 표면적이고 즉각적이고 원초적이다. 사진 한 장으로 손쉽게 성인이 되거나 악마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보이는 것만 볼수록 우리는 타자에 대한 공감의 감각을 상실한다. 이 세상의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와 이 사회에 존재하는 정상성은 지금도 끊임없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강화되고 있다. 그 방향은 보이는 방향이다. 보이는 자들은 더 보일 것이고 나중에는 극히 일부만이 보일것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것이다. 이러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익혀야 할 능력이 있다면, 그건 부재하는 것을 보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만약 동시대 예술이 이 세상에서 기능하는 것이 있다면 그 감각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References

- 사진의 이해, 존 버거, 열화당

- 아흘람 시블리, 아흐람 시블리,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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