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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사람 Mar 29. 2020

오직 예술만이 가진 특성

애매성 (Ambiguity)


Ambiguity(애매성 혹은 중의성)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시지각의 모호성, 상징성, 중의적 표현 등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작품 전체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작품 내에 여럿이 존재할 수도 있다. 관람자는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기도 한다. 작가는 이를 작품 속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관람자의 인지적 감정적 반응을 극대화시킨다. 나는 이 애매성이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중에서 예술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자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뉴턴의 방정식 "F = ma"라는 표현은 "힘의 세기(F)는 물체의 질량의 크기(m)와 가속도크기(a)에 비례한다"는 단 하나의 의미만 지닌다. "F = ma"가 갖는 의미는 중의적이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지도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래서 과학과 수학은 문장이 아닌 기호를 사용한다. 이렇게 과학을 탐구하는 것은 이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미를 찾는 것과 같다. 반면 예술은 그와 정 반대다. 시에서 "A는 B이다."라는 표현은 중의적이어서 수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문장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의미를 제거한다. 반면 예술은 의미를 부여한다. 애매함과 중의적 표현과 상징을 이용해 대상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다.
              

화실에서 본 사크레쾨르 성당, 조르주 브라크, 1910, 캔버스에 유채


단순한 네모 모양 도형 하나만 보더라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인지, 감정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이미지를 시각 처리하는  뇌구조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작가도 애매성을 적절히 배치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도 그 애매성을 통해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재 창작한다. 이렇게 관람자도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이 "관람자의 몫"이다. 애매성이 높을수록 관람자의 몫도 커진다. 곰브리치는 심지어 미술 작품은 애초에 관람자의 참여 없이 완성될 수 없다고 했다. 미술은 시각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이다. 이런 시각적 애매성을 작가는 어떻게 부여했으며, 관람자가 어떻게 느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인간의 뇌는 어떻게 이 애매성을 처리할까? 에릭 켄델(Eric R. Kandel)저서 <통찰의 시대>에서 이러한 주제를 심도있게 다룬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적절하게 조합해 인간이 시각예술을 접할 때 작품에 포함된 애매성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지 설명한다.

첫 번째는 1900년의 빈에서 촉발된 예술과 인물의 역사이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완전하며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프로이트를 통해 그런 인간의 사고체계가 실제로는 무의식과 비합리적인 감정에 지배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더니즘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합리성을 강조한 계몽사상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고 그로 인해 계몽사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00년대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 전통적 미술과 결별하고 예술의 범주를 확장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비합리적인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통찰의 시대는 그런 철학과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작가들은 작품 속에 애매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표현했는지 살펴본다.

두 번째는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인간의 사고 체계이다. 1900년대 빈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왜 뛰어난 작품인지, 그리고 관람자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그때의 작품을 인식하고 감동받는지 그 원리를 뇌신경과학적으로 파악한다. 책에 따르면 뇌의 시각처리체계는 형태를 분해하여 선, 면,  등의 기본 구성요소로 분해한다. 우리 뇌는 그렇게 환원된 기초 조형요소들을 상향식으로 재조합하여 대상을 시각적으로 인지한다. 뇌는 외부세계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인식하지 않고 변형시켜 인식한다. 그중에 과거에 학습되었던 기억과 감정이 크게 개입한다. 1900년대 빈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훌륭한 이유는 작품에 반영된 여러 특징(애매성)들이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인지적, 감정적, 미학적인 반응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을 최대치로 가동시키기 때문이다.


책은 1900년대 빈의 코코슈카, 에곤 쉴레, 클림트 같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들이 어떻게 인간의 감정을 해체하고 재배치하여 애매성을 표현했는지 먼저 소개한 뒤, 우리 뇌가 그 작품이 가진 애매성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생물학적 원리를 다소 어렵지만 흥미롭게 설명해준다. 어쩌면 훌륭한 예술가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의 경험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예술가는 인간의 감정, 심리, 인지체계를 탐구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와도 같다. 1900 빈의 예술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통찰의 시대는 미술과 뇌과학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를 주제를 하나로 엮어 통찰을 주는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과학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이 책을 통해 미술에 더 깊은 매력을 느꼈다. 작품을 감상할 때 뇌의 동작 메커니즘을 살펴봄으로써 미술을 과학적 관점으로도 접근하는게 가능하다는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작품이 좋은 작품일까? 이 질문에 정답이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이 관점을 기준으로 정해보면. 그것은 애매성을 적절히 구현하여 "관람자의 몫"을 최대한 풍성하게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할수 있을것 같다.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뇌가 다양한 경험과 기억 그리고 감정에 휩싸이게 한다. 따라서 작품을 감상할 때 중의적이고 모호한 상징들을 통해,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어떤 시각적, 감정적 반응을 하는지 음미하는 것도 좋은 작품 감상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전에 해보지 못했던 어떠한 감정을 일으키거나, 일상에서 겪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것이 기이하거나 충격적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도구를 통해 이 세계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한다. 어떤 도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도구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대상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증명한다. 한편 그것과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 도구도 있다. 그 도구는 대상을 하나의 수식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여러 의미를 더 입힌다. 그래서 한 대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이 예술이며 애매성이라는 예술이 가진 본질적 특성이 그 역할을 돕는다. 수식이 표현하는 대상이 아닌, 예술이 표현하는 대상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더 강하게 느끼고, 경험하고, 감동하게끔 하며 때로는 공하고, 연대하게 한다. 그것이 미술 그리고 예술이라는 도구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인것 같다.





References:

통찰의 시대, 에릭 캔델, RHK


작품 사진 출처:

-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 마르셀 뒤샹

- 화실에서 본 사크레쾨르 성당, 조르주 브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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