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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사람 Mar 04. 2020

모나리자는 미술이 아니다

미술은 시대적 합의다

미술만큼 무엇이라고 한 번에 정의 내리기 어려운 대상이 또 있을까? 무엇이 미술인가? 그리고 무엇이 미술이 아닌가? 인간이 창작한 모든 것이 미술이 될 수 있을까? 수 천 년 전의 그림과 50년 전의 그림도 모두 동일한 범주의 미술일까?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이렇게 답을 내리기 쉽지 않은 미술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명쾌한 단서를 제공한다.

미술은 근대(지난 200년간)의 발명품이다.


저자는 도입부터 주장한다. 어떤 대상이나 작품을 미술이라고 정의하는 것 자체가 근대 이후 탄생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흔히 알고 있었던 고전 명화들, 조각품, 벽화 등이 모두 미술이 아니었다는 설명을 이 책에서 처음 들어봤기에 충격적이었다. 책을 더 진행하며, 100년 전 사람들이 뒤샹의 변기도 미술이다라고 합의한 것과, 2만 4천 년 전 인류가 만든 비너스상을 고대의 미술이라고 규정한 것이 근본적으로 같은 행위라는 설명을 들으니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결국 미술은 약속이다. 지금 시대에 미술 작품이라 불리는 수백 년 전의 창작물들은 모두 근대 이후의 미술가나 역사가 그리고 미술사가들에 의해 "미술"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것이다. 자연적으로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문화적 시대적 언어적으로 합의된 것이다. 어떤 대상을 미술이라고 부르자는 그 합의는 시대와 문화 그리고 기술의 발달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100년 전 미술과 지금의 미술은 분명 다르게 정의된다.


100년전에 만들어진 마르셀 뒤샹의 변기 <샘>과, 약 2만2~4천년전에 만들어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인간은 항상 사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약 200여 년 전에 서양에서 발명된 "미술"은 사물과 대상을 인식하고 분류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도구였다. 특별하게 분류된 사물을 보며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또 다른 시각적 즐거움을 향유하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가 미술이라고 부르는 창작물들은 그러한 제도와 약속에 의해서 비교적 최근에야 범주화된 것이다. 반면 근대 이전의 미술은 현대의 미술과는 다른 목적의 "도구"였다. 절대자의 정치적 선전 도구나, 종교적 구원을 위한 수단, 공예 따위의 생활에 필요한 도구 등, 어떠한 목적을 가진 일상의 맥락 내에서만 존재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미술은 일상의 맥락과 동떨어져 미술이라는 용어로 규정된 범주 내에서만 존재한다. 미술과 예술이라는 용어, 예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미학,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과 박물관, 미술사 등은 모두 근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근대 이후에 새롭게 탄생한 것들이었다.


모나리자를 그렸던 다빈치는 본인이 만들었던 회화를 미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당시 회화는 이 세계를 보고 이해하고 기록하거나 종교적 수단을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미술,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대의 미술사가들에 의해서였지, 과거의 그 사람들이 그것을 예술로 부른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 모나리자는 미술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과학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이 그 시대에는 회화나 조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활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봤을 때 문화 예술 과학 기술에 전방위에 걸친 다빈치의 업적은 근대 이후 분류된 것일 뿐, 당시 다빈치 본인은 하나의 분야에서 작업들을 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당시 그는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라 위대한 테크니션이었을 것이다.


예술이 시대적 맥락에 따라 규정된 약속이라면, 동시대의 예술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술은 우리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던 "이데올로기적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적 관습은 다음과 같다.


- 실제를 눈가림하고 은폐하는 것.

- 사회적 의식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집단적 생각(Meme).

- 문화 텍스트에 의해 표현되는 견해.

- 사회 질서 내의 의식이나 관습에 의한 실천 행위.

- 대중의 의식을 변경하는 선전 행위를 위한 개념.


우리 시대는 이데기올로기에 의해 고착되어버린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관습으로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기울어진 이 세상에는 유러피언, 백인, 남성 등과 같이 태어날 때부터 젠더 권력, 인종 권력의 우위를 점한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사실은 관습화 되어 그 특권이 얼마나 유리했는지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다. 어느 분야나 기득권화된 존재들이 있지만 그것이 기득권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역사가 단방향이고 문명이 시간을 거치면 일차원적으로 진보한다는 단선론적 역사관도 근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고정관념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 관습이 만든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이 시대에 합의되는 동시대 미술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관습에 균열을 가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예술의 범주를 초월해, 시대와 사회, 문화와 기술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친다. 한 시대의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가 변경될 수 도 있다. 이데기올로기적 고정관념은 항상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감춘다. 일반 대중은 그것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한 대상을 포착하고, 수면 위로 끄집어내고, 이슈화 하고, 공론화하는 창작물이 바로 이 시대가 분류하고 정의한 동시대 미술이라는 "약속"이다. 그래서 동시대의 시각 예술은 단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 안에 숨겨진 함의를 읽는 것이다.


미술과 예술을 떠나서, 우리의 사고방식은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언어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생각보다 매우 많은 것들이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서 약속되고 합의되었다. 의사소통을 매개하는 언어와 문자도 약속이다. 프로그래밍 언어도 컴퓨터와 인간의 약속이다. DNA 염기 서열의 코드도 인간 연구하기 쉽게 이름 붙인 약속이다. 음악의 악보도 연주하기 쉽게 만든 약속이다. F=ma 같은 관계식도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들 간의 약속이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법도, 환율과 주가지수도 약속이다. 그리고 미술도 약속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화된 대상은 모두 인간들이 정의하고 규정한 약속이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 고정 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은 절대적으로 보이는 것도 시대가 바뀌고 사고방식이 변하면 충분히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삶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관습화 된 고정관념들, 특히 우리의 사고방식을 제한하는 이데기올로기적 관습을 대해는 태도는 "의심"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시대에 그 누구보다도 동시대 미술가들이 그 역할을 가장 선봉에 서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References: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

사진 출처(링크):

Marcel Duchamp, L.H.O.O.Q

Marcel Duchamp, Fountain

Venus of Willend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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