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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Aug 25. 2021

북미지역을 떠돌던 불나방

셋, 책일기

 직속 제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자였던 친구가 어느새 자라 동료가 되다니, 선생님께도 정말 멋진 인연으로 생각될 것 같아요! 은퇴하면서 적으신 글이라니, 요즘 그런걸 업세이라고 하나요? 직업에 관련된 이야기를 묶은 에세이 글이요. 저는 에세이 중에서도 업세이를 무척이나 좋아해요. 그냥 수필집을 읽으면 그저 저자와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에 그치는데, 업세이를 읽으면 저자가 몸담았던 그 직업 그 자체가 저와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서, 매일 마주하는 세상이 조금 더 확장되고 따스해진 기분이랄까요?


 요즘의 저는 삶을 하얗게 불태우는 편은 아닌 거 같아요. ‘몰입’이라는 단어에 열광했던 적도 있는데, 한 가지에 특출난 천재보다는 뭐 하나 빼먹지 않고 두루두루 해내는 사람이고 싶거든요. 이렇게 잔잔히 타다 보면 55년이 지난 후까지도 여전히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 파는 사람일 수 있을까요? 리밍 님의 선생님이 너무 부러워요. 


 지금은 이렇지만 20대에는 상당한 불나방이었답니다! 당시 저는 ‘세상은 아직 선하고 아릅답다’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런 저를 걱정하거나 세상을 모른다며 손가락질하는 이들을 그저 비관적인 사람으로 치부했어요. 그들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짐을 정리하고 배낭 하나 짊어진 채 여행을 떠났죠. 당시 미국이었는데, 통장에는 한 백 불 정도가 들어있었던 것 같아요. 정해진 목적지도 기한도 없으면서, 여행을 무사히 마치면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거봐! 세상은 아직도 선하고 아름답지?! 하고요.


 ‘카우치서핑’ 이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안전하게 여행을 마무리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게 되지는 않았어요. 진짜 세상을 보게 된 것이죠.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제 삶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깨닫게 되었어요. 저는 그럭저럭 호감형인 동양인 여자였고, 그럭저럭 괜찮은 학교의 학생증을 들고 있었고, 걱정하며 연락해오는 친구와 가족들이 있었잖아요. 제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슬퍼하거나 저를 찾아 나설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모두 다 운 좋게 얻은 것들이었어요. 


 당시 제 여행의 철학은, 최대한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거든요. 공교롭게도 길거리에 사는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되었는데, 그들이 말을 하더라고요. 자신들이 잃은 것은 단순히 집이 아니라고.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하나씩 하나씩 전부 잃어버린 것이라고. 그들이 경험한 상실의 과정을 들어보니, 약이나 술에 의존하는 그들의 현재를 비난할 수 없겠더라고요. 다시 힘을 내보라고 응원조차 쉬이 할 수 없겠더라고요. 


 여행을 마칠 때쯤 깨달았어요. 저는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제가 꼭 해내야 하는 일, 그리고 저만이 꼭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떠난 거였다는 사실을요. 이렇게 적고 보니 조금 오글거리기도 하네요? 하하.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너무 많이 들여다보게 된 것인지 여행이 끝난 후에도 열정은 식지 않았어요. 정치권에 발을 들여볼까 인턴쉽을 해보고, 돈을 왕창 벌어 세상을 바꿔볼까 자격증 준비도 해봤어요. 잘 되지는 않았지만요.


 오늘날의 저는 매일매일 들끓는 열정으로 살고 있지는 않아요. 세월과 함께 열정이 식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믿어요. 왜냐하면 이제는 정말로 제가 이 세상을 위해 꼭 해내야 하고 해낼 수 있는 일을 찾았거든요.


 저는 글을 옮기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어쩌면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죠. 사실 제가 가장 애쓰고 있는 것은, 매일매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나로 인해서, 혹은 나의 삶의 흔적으로 인해서, 한 번이라도 더, 세상은 선하고 아름다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애쓰고 있어요. 가족들의 관계를 완만하게 하기 위해 인내하는 것도, 억지스럽게 책을 출간해서 무상으로라도 널리널리 뿌리고 있는 것도, 다 그런 노력일 거라 생각해요. (사실 저도 제 마음을 잘 몰라서, 그저 추측해볼 뿐입니다? 하하.)


 인생의 한 단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퇴임하는 마음이 어떨까, 궁금해요. ‘그대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라니, 정말 너무 멋진 분이시잖아요. 분명 후회를 남기지 않을 만큼 불태우셨기에, 그 시간들을 글로 고스란이 담아 책으로 정제하실 수 있으셨을 거라 생각해요. 찾아보니, 아직 서점에 등록되지 않은 것 같네요. 꼭 구입해서 읽어보고 싶으니, 정식 출간되면 정말로 꼭 알려주셔야 해요!


 저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네요. 이십 대부터 지금까지 열정의 순간이 없었기에 그만큼의 시간을 거슬러올라가야 했던 것은 아닐지 반성하게 되는데요. 자경 님은 워낙 열정적이고 정열적인 분이라서, 모든 것을 바쳐 하얗게 불태웠던 이야기가 한가득일 것 같아요. 자경 님의 이야기,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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