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책일기
친구들, 참 오랜만에 제가 읽은 책 일기를 쓰네요. 조금 느리지만 꾸준히 읽고 나누는 이 공간이 참 좋아요.
저는 친구들이 접한 적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접하기 어려울(?) 책을 읽었어요. <우리 숨바꼭질할까>라는 책인데요. 저와 인연이 깊은 분이 며칠 전 펴내신 따끈따끈한 책이에요.
저자는 제가 근무하는 학교 선생님이세요. 이번에 퇴임하시면서 그간의 교직 생활을 회고하며 쓰신 뜻깊은 책이에요. 저자와 저는 8년 전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8년을 동고동락하고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버렸어요. 어쩌면 가족보다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한 셈이죠.
더 재미난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저자와 근무를 하면서 우연히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 얘기를 했었어요. 그런데 세상에, 십몇 년 전 제가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이셨지 뭐예요? 저는 5학년 7반이었고, 선생님은 1반 담임 선생님이셨어요!
어느 날 학생들 각자에게 초록색 천을 하나씩 나눠주면서 점심시간에 책상 위에 천을 깔고 급식을 먹기 시작한 적이 있어요. 그 기억을 얘기했더니, 당시 저희 초등학교가 선도학교라서 그런 사업을 추진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전교생이 장래희망을 적은 종이를 타임캡슐에 담아 교정에 묻는 행사를 하기도 했어요. 그 행사를 추진하신 분이 이 선생님이셨대요. 엄청난 행사였거든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있고, 진짜 포클레인이 와서 땅을 파고 타임캡슐을 넣고 또다시 흙을 덮고... 2020년 5월 5일 10시에 개봉식을 하기로 약속했었어요. 그때 선생님과 손잡고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코로나로 조용히 취소됐어요.
초등학교는 중고등학교와 다르게 과목별 선생님이 계시는 게 아니라 담임 선생님께서 거의 전 과목을 다 수업하시니까 오른쪽 복도 끝 7반에 있는 제가 왼쪽 복도 끝 1반에 있는 선생님을 알 리는 없었죠. 그런데 십몇 년이 지나서 저와 동시대에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을 만나 오래전 기억을 꿰맞추다니! 너무 소름 돋게 반가웠어요.
아이들은 하나의 숫자나 번호가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이름 부르기는 서로를 환대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p33
저자는 550명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고, 직접 불러주셨어요. 모두가 그게 되겠냐며 의심할 때 기꺼이 전교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외우고 불렀어요. 아이들 사진과 이름을 적어둔 파일을 들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들춰보고 또 들춰보셨어요. 팅팅, 영지님은 그런 기억 있나요?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준 기억?
그렇지. 교실에는 책이 많지. 너는 교실에 있는 많은 책을 만나야 하는 주인공이지. 경서 너도 교실 속에 있는 소중한 한 권의 책이지. -p107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번뜩했어요. 비단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이 된 우리도 우리만의 한 권의 책을 쓰고 있는 거였어요! 비슷해도 절대 같을 순 없는 내가 쓴 나만의 책. 내가 주인공인 나만의 책.
저자는 퇴임을 하며 한 권의 책을 펴냈지만 아직 저자의 책은 끝나지 않았어요. 저자는 40여 년의 교직 생활 이야기를 맺고 이제 새로운 삶을 써 내려갈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꼬꼬마 아이들이 훌쩍 자랐을 때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추억에 잠기겠죠. 저처럼요.
저자는 아이들과의 시간을 숨바꼭질이라고 표현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아이들을 통해 숨겨진 나를 하나씩 발견하는 숨바꼭질을 할 수 있었다고요. 참 쉽지 않은 일이죠. 아이에게서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대다수의 어른들은 아이에게 배움을 줘야 하고, 아이는 그저 생각이 미진한 존재라고 치부하기 마련이니까요.
꼭 교직과 관련이 없더라도 열린 마음, 열린 생각, 존중하고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해요.
제가 8년간 직접 옆에서 지켜본 저자는 아이들에게만큼은 진심이었어요. 정녕 '아이들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교사였어요. 아이들에게도 본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 저자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더불어 자신이 택한 길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한 길만 꾸준히 걸어온 자부심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아이들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그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p222
두 분은 내 모든 것을 바쳐, 하얗게 불태웠다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신가요?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을 누군가가 있으신가요?
-유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