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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Nov 01. 2022

책 만드는 번역가

책을 온전히 구성해서 좋은 점

     혼자서 책을 만들고 있다. 번역도 하고, 편집도 하고, 편집장이라는 직함도 가지고 있다. 여러 역할을 해내다 보니 가끔은 버겁다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본문 선정부터 구성까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건, 번역가로서는 상당히 감사한 기회다. 원문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작품을 확장할 수 있으며, 번역가가 파악한 원저자의 작품의도를 독자에게 더욱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 


     번역가는 원문을 변형할 수 없다. 4회 차로 구성된 번역 수업 중 2회 차에는 번역가 마음껏 원문을 바꾸어보라고 제안할 때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는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원문의 의미를 도착어로 담아내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번역가는 도착어를 통해서 원저자의 머릿속 그림을 독자의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 넣는 사명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원문과 번역문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해야만 한다.


     하지만 번역가는 때때로 너무 어려운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며 사람도 변해서, 당시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내용이지만 현대의 독자에게는 너무나 난해하고 괴롭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번역가는 고민하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다’라는 사실을 번역에 반영할 것인가, 아니면 원문이 담은 그림 그대로를 번역해낼 것인가. 때로는 단어 치환으로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깊이의 문장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면 또 고심한다. 직역하고 번역가의 주석을 덧붙일 것인가, 아니면 의역을 통해서 문맥을 살려낼 것인가.




     나는 작품에 주석을 달지 않는다. 괄호 병기도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소소한 장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품의 몰입을 해치는 커다란 장애물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로라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할 때는, 원문과 번역본을 나란히 담아 원저자의 문장을 바로 옆에서 찾아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1인 출판사라서 과감하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고, 번역가가 만드는 책이기에 담을 수 있는 편집이다. 보통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분량이 약 70% 정도로 줄어들기 때문에, 영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본을 나란히 제공하기 위해서는 문장을 늘리고 줄이며 번역가가 직접 편집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 읽히는 번역을 목표로 한다. 원문이 바로 옆에 있기에, 약간 더 폭넓게 의역하는 편이다. 대신 주석이 필요할 정도의 깊은 은유나 비유가 숨어있는 표현의 경우에는 뒤편에 짧은 해설을 덧붙인다. 길고 긴 역자의 말은 읽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개인적 통계 때문에, 간략한 해설을 덧붙여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작품을 완독 한 후에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작품의 이해를 돕는 원저자의 다른 수필이 있다면 덧붙이고, 작품의 주제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기 위한 추가 자료가 있다면 그 또한 덧붙인다. 지금까지 출간한 책들을 보면, 재미있는 작품보다는 짜임새 있는 구성이 더욱 많은 선택을 받고 있다. 




     환경보호에 마음을 쓰고 있다. 과연 종이책을 만들어 파는 것이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두 개의 언어를 나란히 담으려고 종이를 두 배로 사용하고 있어서, 자주 회의감이 든다. 전자책이나 어플 제작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기계에 밝지 못한 사람이라 아직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지 명확한 청사진이 그려지지 않는다.


     원문을 나란히 담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일인가, 나름의 덧붙임 자료가 독서를 진정으로 풍성하게 만들고 있는가, 하는 회의감 말이다. 그러나 본업이 번역가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생각이 닿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원저자의 위대함을 내가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깊이 자료조사를 하기에, 원저자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느낀 작품의 깊이를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해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번역가가 만드는 책이라서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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