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쯤 잡지 <Whistle> 에 달리기에 관한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인생에서 내 글이 그렇게 전국구로 퍼진 적은 처음이었는데 (전국 교보문고 잡지 코너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돌아보면 러닝 초짜중에 초짜가 어떻게 그런 자신만만한 글을 쓸 수 있었나 조금 부끄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코로나가 창궐한 지난 2년동안 사실 나는 러닝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마스크를 쓰고 러닝을 한다는 건 폐활량이 적은 나에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 시도는 해 봤지만 그때만 해도 야외에서도 모두 철저하게 마스크를 착용하던 시절이었어서 잠깐 숨이 차서 마스크를 벗는 것조차도 눈치가 보였고 나는... 그러게. 그땐 무얼 했는지도 사실 기억이 안 난다. 글만 거창하게 써 두고 숱한 좌절을 겪으며 격동의 20대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런데이를 접한 건 대학 친구 J 덕분이 컸다. 언젠가 다이어트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을 인스타에 올린 적이 있는데, 빗발치는 간증 속 내가 가장 실천하기 좋아보였던 건 J가 추천해준 런데이 어플이었다. 깔아 보니 그 전에 쓰던 나이키 런처럼 뛰는 그 자체에 집중한 어플이 아닌, 나같이 1분도 못 뛰는 초보자를 위한 어플이었던 점이 맘에 들었다. 8주간 일주일에 3번만 뛰면 30분을 안 쉬고 뛸 수 있게 해준다니, 게다가 J는 밥을 다 챙겨먹으면서도 달리기 덕에 살을 뺐다는데. 사기 아닌가 싶으면서도 밑져야 본전이니 시작했다. 그게 5월이었다.
생각보다 런데이는 전국구 어플이었다. 주변 지인이나 친구 중 런데이를 쓰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달리며 이들과 응원을 주고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는 무릎이 안 좋아서 어플이 권장하는대로 일주일에 3번을 지켜서 뛰진 못했지만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뛰려고 노력은 했다. 여름에 한 달은 너무 더워 죽을 것 같아 쉰 것만 제외하면 그래도 꾸준히 뛰었다.
가을이 된 후 날씨가 시원해져 러닝에는 좀 더 가속도가 붙었다. 5분 연속, 10분 연속, 15분 연속 뛰는 건 너무 어려워 보였지만 뛰다 보니 그걸 다 하게 되었다. 그 때마다 자신감이 생겼고 조금 더 난이도 있는 단계에도 용감하게 도전해보게 되었다. 포기하면 가오(..)가 안 서니까.
예전에 AC2 과정을 들으면서 창준님이 어떤 일에 있어 실력을 확실하게 늘리는 법을 설명해주신 적이 있다. 그건 바로 꾸준하게, 점진적으로 난이도를 올려가며 시도하고 해결하는 것. 런데이는 이 원칙에 입각해 충실하게 만들어진 어플이었다. 할 때마다 동일한 시간이지만 달리는 횟수가 늘거나, 시간이 조금씩 증가하거나 하는 방법을 통해 실력을 눈치채지 못하게 늘려 놓는 방식. 뛸 땐 잘 몰랐다가 돌아보니 '이게 되네?' 싶은 순간이 많았다.
나도 동의하는 바고 사수도 언젠가 말해준 거지만 나처럼 자신감과 자존감 모두 낮은 사람에겐 삶 속에서 작은 승리를 여러 번 하게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결국 진짜 사람은 아니지만 목소리로 늘 나를 격려해주는 버츄얼 코치와 나날이 늘어가는 달리기 실력을 보며 나는 '이게 되네!!!' 를 외치는 순간이 부쩍 많아졌던 듯 하다. 페이스가 8분 대만 나오다가 갑자기 6분대가 나온 그 날은 아직도 못 잊겠다.
15분을 넘어 20분, 20분을 넘어 25분을 달릴 수 있게 되자 30분이 갑자기 만만해보이는 기적이 일어났다. 어제가 그 날이었는데, 막판에 머리가 잠깐 띵하긴 했지만 다 달리고 달리자마자 전화영어를 30분 또 하고 집에 들어가 성취의 기쁨을 맛봤다. 8주짜리를 무려 6개월로 늘려 달성하긴 했지만 어쨌든 도장을 다 찍었으니까 !
이걸 다 하면 이제 마라톤 5km는 뛸 수 있게 된 거라는데, 어제 12월 부천 복사골 마라톤 공지를 보고 아주 약간 마음이 동하긴 했다.
올해는 이런 저런 직면과 도전의 순간이 많았다. 정신차려보니 몸무게는 3년 전에 매주 사당에서 술 마시던 시절만큼 불어 있었고, 자존감은 낮고, 가고 싶었던 회사에 운좋게 들어가긴 했지만 개인적인 위기는 늘 겪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보다 6kg를 더 감량했고(식단은 따로 안 했다. 했으면 더 빠졌겠지만 나는 세 끼 꼬박 잘 먹어야 탈이 안 나는 사람이라..) 자존감과 개인적 위기는 계속 있긴 하지만 어떤 과정의 결과물이 아닌 과정 그 자체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불과 몇개월 전만 해도 나는 우울증 약을 3년 넘게 복용하고 있었고, 우울함에 젖어 지내는 날이 많았다. 지금의 나는 달리며 모든 스트레스를 푼다. 달리지 않는 날엔 걷고, 근력 운동을 하며 뿌듯함을 느낀다. 런데이 버추얼 코치님이 늘 하는 말이 생각난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신경쓰지 마세요.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길이 있고 페이스가 있습니다!" 아멘이다.
다음 스텝은 '30분 달리기 능력 향상' 과 '50분 달리기 도전' 이다. 네이버에서 새벽마다 런데이로 50분 달리기를 하는 분의 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심지가 단단하고 삶이 알찬 분이라는 것이 단번에 느껴졌다. 그리고 저 모습이 내가 어쩌면 이룰 수 있는 모습이란 것에 기뻐졌다.
(여담인데 런데이는 90년대 후반 한국을 휩쓸었던 스타크래프트의 국내 퍼블리싱을 담당한 한빛소프트의 작품이다. 김유라 대표님을 몇 년 전에 Women in Game 밋업에서 만났었는데, 아마 나를 기억하진 못하시겠지만 회사의 위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서비스로 승화시킨 그 분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
달리기에서 절대 1등을 해본 적 없는, 체육 시간만 되면 스트레스 받던, 아무튼 달리기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이제 삶에서 무언가를 원한다면 할 수 있음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달리며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