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성장서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치슬로 Dec 13. 2022

홍제동

22.12.10

오랜만에 간 홍제동은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듯 여전했다. 늘 거기 있는 주재근 베이커리도, 골목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도, 저 멀리 보이는 북한산 자락까지. 그와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이자카야까지도. 홍제역 출구에 가만히 서서 상념에 잠겨 있는 찰나 다시 이 곳에서 볼 거란 생각도 못 했던 얼굴이 튀어나와 나를 반겼다.

우리의 인연도 참 길고 두터운 듯 하며 또 기묘하지. 우리가 어느 시기를 가만히 웅크려 통과하던 불광동 혁신파크가 곧 사라진단 얘기를 주고받으며 안산 자락길을 올랐다. 용산과 불광, 연희동, 일산, 그리고 다시 돌아와 여기 홍제. 아주 잠시 몸담았던 선교단체에서의 인연은 서로가 아주 조금씩 낸 용기와 우연들로  말미암아 10년째 이어지고 다.


오래 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홍제동과 후암동을 배경으로 한 <개의 역사>를 보며 나는 한참을 울었었다. 홍제역 계단을 오르며 오늘 그를 마주칠지도 모른단 생각을 잠시 했지만, 사실 이제 마주친다 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지 않은가. 그때의 그와 나는 다른 시공간 속으로 스러져갔고, 추억은 가슴을 저미게는 하나 힘은 없다. 오직 분명한 건 단 하나, 내가 지금 여기에 서 있단 사실.

 

커피가 엄청 맛있단 안산 자락의 <아이덴티티커피랩> 이 사람이 다 차서 한 몇년 전부터 가보려고 별렀던 <하이드미플리즈> 에 가서 친구가 사주는 커피와 도넛을 먹으며 일을 좀 했다. 원랜 딴 거 팔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도넛이 유명한 집이 되어 있었다. <담은식당> 에선 기가 막힌 밑반찬과 불낙전골을 먹고 집에 가서 '프리시전 네비게이터 까쇼 2020' 을 깠다. 라벨이 예쁘고 에어링이 더해갈 수록 단맛이 우러나는  무난하게 맛있는 와인이었다.


'내가 바로 7080이요' 라고 말하는 도끼다시 장식이 입구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오래된 빌라는 친구의 아늑한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그림책 콜렉션을 보고 전진희, 빌 에반스, 스텔라장을 들으며 삶과 신앙,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 내 얘기를 꺼내고 공감받으며 그 몇주간 내 안을 쳇바퀴처럼 돌며 괴롭히던 생각이 한 순간에 눈물에 녹아 사라짐을 경험할 수 있었다.


와인 한 병을 둘이서 거의 다 비운 덕택인지 약간은 취기가 오른 상태로 정신을 차려보니 집에 금방 다 와버렸다. 엄밀히 말하면 그게 절대 '금방' 은 아니었지만, 설원을 달리는 열차가 터널을 통과해 다른 나라에 당도하는 느낌처럼 그 여운을 모두 간직하고 머금기엔 신분당선은 너무 빨랐다고밖에... 그리고 나는 5시간 자고 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 교회에 달력을 팔러 갔다. (여기선 수포자인 내가 이세계에선 암산천재?ㅋ)


내 20대 인간적으로 너무 불안하고 힘들었지만, 내 인생의 다른 어떤 구간에서도 다시는 만나기 힘들 아름다운 기억과 낭만이 가득 차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다시 소중한 사람을 만나 새 옷을 입었다. 다음 시간엔 용산에서 와인 한 병 까기로 했다. 그 땐 또 우리의 용산에서의 시간을 얘기할 수 있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